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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Mar 01. 2021

네팔에서 한달살기

나의 소원 가운데 하나는 아내 에미마와 아내의 고향 네팔에서 한달살기이다. 짝사랑으로 끝났던 첫사랑의 실연과 군대에서의 부적응과 스트레스로 조울증에 걸렸다. 첫사랑이 지나간 후에도 평생 사랑할 단 한 사람의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했지만, 내가 사랑했던 여자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에 집착했다기 보다, 호르몬이 움직이는데로 나의 마음은 움직였고, 나는 호르몬을 콘트롤 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첫사랑 이후에도 예쁘고 착한 여자를 향한 깊은 사랑에 빠질 때, 상사병으로 조울증이 재발하기도 하였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불가피하게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경력이 단절되게 되었다. 동생의 실용음악연습실 사업장 일을 도우며,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 하신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귀농 교육을 받고 왕대추농장을 함께 하였다.


세상에 누가 나를 사랑할까, 장가갈 수 있을까, 인생에 사랑은 꼭 필요한가 생각하며, 사랑과 결혼을 포기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으며, 살면서 지나가는 인연이 있으면 인스턴트 사랑이나 하면서 살지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던 차에 둘째 고모를 통하여 에미마를 소개 받게 되었다. 한국인인 고모의 절친 내외 분이 오랜 기간 동안 네팔에서 비지니스와 봉사활동을 하시며 살고 계셨다. 고모의 절친 분께서는 아내 에미마를 친 딸처럼 생각하셨고, 아내 또한 그분을 정신적인 어머니처럼 생각하며 따랐다. 아내 에미마는 그분을 앤티 이모라고 부른다.


아내 에미마는 슬픈 제 삶을 따뜻하게 해 준 참 고마운 사람다. 2018년 12월에미마와 네팔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아내 비자수속 기간 동안 6개월간 네팔에서 신혼생활을 보냈다. 2019년 작년 5월에 한국에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 왕대추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블로그에 네팔아내 에미마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매일 매일 썼다. 취미 차원 보다도, 사랑 에세이로 출간작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호구지책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블로그를 시작한지 2개월 만에, 연합뉴스 TV 작가에서 전화가 왔다. 블로그에 글쓰기를 통하여 방송에도 출연하였다. 블로그 글쓰기 이벤트를 통하여 200만원 상금을 타기도 하고, 밀리의서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문학살롱 SNS에 소감 쓰기 이벤트에 당첨되어 인천공항 근처 파라다이스시티 1박 2일 숙박권을 경품으로 받기도 했다.


ㅁ기회가 되면 사랑하는 아내 에미마의 나라 네팔에서 한달살기를 하고 싶다. 놀러 가면 내 돈 내고 가야 하니까, 내가 선한 영향력 있는 작가나 유튜브 인플루언서가 되면,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콘텐츠를 만들러 가고 싶다. 


천번이고 다시 태어난데도 그런 사람 또 없을테죠
슬픈 내 삶을 따뜻하게 해줄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중에서 -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난 나의 어렸을 적 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고2가 되면서 하나님을 사랑했던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소녀를 사랑했다. 나는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소녀를 사랑하고 싶었지만, 소녀에게 나는 예수님이 아니었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까치 오혜성이 팜므파탈 엄지를 자신의 인생을 파멸까지 몰아가도록 사랑했지만, 나는 까치 오혜성이 야구를 잘 했던 것처럼 무엇인가 한 분야에 뛰어난 천재가 아니었다. 군대에 간다고 하면 사랑했던 소녀가 커피 한 잔은 함께 마셔 줄 주 알고 너무 보고 싶어서 군대를 지원하여 자원입대 했는데, 소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 오래도록 사랑을 품고 있다가 소녀에게 고백했을 때, 소녀에게는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가 우리가 고3이 시작하던 어린 나이였는데, 소녀는 결혼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른다. 늦은 나이까지 결혼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고1 때부터 알고는 지냈지만 별로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고2 때 딱 1년 정도 학교 동아리 기독학생반 회장과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함께 동아리 일을 했다. 소녀가 회장 내가 부회장이었다. 나는 소녀를 깊이 사랑했지만, 우리가 썸을 탔던 것도 아니다. 남사친 여사친도 아니었다. 소녀가 나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였고, 나도 소녀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 그것은 단지 동아리 회장단으로서 함께 일을 하는 동료로서의 사이였다. 나에게는 소녀가 유일한 여자였지만, 소녀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인간관계도 좋았고 인기도 좋았어서 주변에 남사친들이 많았다. 소녀에게 나는 남사친 중 하나도 아니었다.


어쩌다 인터넷 검색으로 그녀의 소식을 듣는다. 이름 하나 바로 뜨는 정도는 아니지만, 두 가지 연관검색어를 조합하여 검색하면 간단한 근황 정도 뜨는 사회적 성공을 했다. 서울의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스트레이트로 하여, 지금은 기독교 사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전도유망한 대학까지는 아니지만, 그렇게 나쁜 대학도 아니다. 독실한 기독교인 교수로서는 괜찮은 직장이기는 하다. 미련이 남아 검색창에 어쩌다 한번씩 소녀의 이름과 연관검색어를 넣어보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때 그 시절 그 소녀는 뭐하고 사나하는 호기심이라고나 할까? 예전에 사랑했던 모든 사랑들이 꿈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첫사랑이라서 그런지 어쩌다 한번씩 꿈에 나온다. 그것을 무의식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꿈에서 나는 여전히 소녀를 그리워 하고, 소녀는 다른 편을 바라보고 있다. 꿈을 깨고 현실감을 되찾으면 전혀 그리움이 남지 않지만 말이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무의식이 기억하는 의식을 지배한다는 프로이드의 개소리를 믿지 않는다. 프로이드가 인류에게 인사이트를 준 천재는 맞지만, 그의 아이디어 가운데 개소리도 많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은 잊혀 가는 옛기억들이다. 어쩌다 새록 새록 생각 나기는 하지만,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물론 지나간 나의 무의식이 현재의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너 혹시 내 사진을 찾아보거나
나 몰래 내 소식을 검색하는 일 안 돼
이젠 안 돼 우린 안 돼 너와 나
- 김나영, 양다일의 《헤어진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

어렸을 때 나는 어머니가 훈육대로 동요와 클래식과 기독교 음악만 들었다. 대학에 가서는 김광석, 유재하, 토이 감성변태 유희열, 피아니스트 노영심과 김광민, 이소라, 봄 여름 가을 겨울, 동물원, 시인과 촌장, YB, 신승훈, 이승철 등을 들었다. 그때는 신승훈이 제일 좋고, 지금은 이승철이 제일 좋다. 물론 지금은, 아이유, 볼빨간사춘기, 국카스텐, BTS, 트와이스 등도 좋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곡을 랜덤으로 돌려서 듣기도 하지만, 음원사이트에서 스트리밍으로 인기 차트를 순서 대로 듣는다. 언젠가 멜론 차트에 김나영 양다일의 《헤어진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 올라 왔는데, 가사 내용이 재미 있었다.


헤어진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 중 하나가 있다고 한다. 혹시 사진을 찾아 보거나, 몰래 소식을 검색해 봐서는 안 된단다. 나는 가끔 교수가 된 옛소녀를 검색해 본다. 물론 나와 사귄 것도 헤어진 것도 썸을 탄 것도 아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7년 동안 짝사랑했다. 그 칠년 사이에 다른 여자를 겹쳐서 짝사랑 하기도 한 것 또한 솔직한 사실이기는 하다. 소녀 말고 썸도 연애도 아닌 순수한 여자사람친구로 자주 만나서 같이 밥 먹던 누나도 있었다. 나보다 1살 위이기는 했는데, 내가 빠른 생일이라서 같은 학년으로 각자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대학에서 만났기 때문에, 나는 친구 먹을려고 했고 상대는 나를 동생 먹으려고 했다.


아내가 내가 다른 여자 이야기를 쓰는 것을 알면 기분이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첫사랑이 어긋낫기 때문에 에미마와 내가 만나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나의 삶이 어긋나서, 병들고 아픈 사람을 다른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아서, 에미마를 만나게 되었다. 다른 여자 에미마 이야기를 쓴 까닭도 결국 에미마를 만나게 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다.


작년 2019년도에는 동생 사업장을 돕는 하루를 빼고 주중에는 논산에서 왕대추농장을 아버지와 아내와 함께 가꾸었다. 주일 오전에는 수원에 아버지께서 목회 하시던 예사랑교회에 가고, 오후에는 수원중앙침례교회의 네팔어 예배에 아내 에미마와 함께 갔다. 일과 외에는 한국어교원 과정을 온라인으로 공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나의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평균 보다는 글을 잘 쓰지만, 글로 밥을 먹고 사는 작가들과 비교하면 수준미달일지도 모른다.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는 문학성이 있는 글쓰기는 아니고, 대중성과 상업성이 되는 글쓰기였다. 까놓고 말해 돈이 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문학성이 어느 정도 있어야 사람들이 돈 내고 사 볼 확률이 높아지겠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책이 많이 팔리면 된다. 나의 목표는 글로 밥 먹고 사는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원고지나 아래한글에 글을 써서 출판사에 투고하거나, 신춘문예에 도전 하는 고전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온라인 플랫폼인 블로그와 브런치에 온라인 퍼스트로 올리고, 블로그나 카카오 메인에 노출 되기를 기다린다. 스마트 세상에서 인플루언서가 되어 출판사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리는 방식을 구상 했었다.


오래 전부터 블로그 도전을 했었다. 썼다가 지웠다를 반복했다.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컨셉의 블로그 디자인이 있는데 모 아니면 도였다. 아주 화려하거나 아주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최종적으로 심플한 디자인으로 선택 했다.


다시 블로그에 도전했다. 8월 부터 매일 글을 쓰기 시작 했는데, 10월 초에 블로그 핫토픽에 하루 이틀 오르더니, 방문객 수가 상승했다. 도로 내려 갔지만 말이다. 핫토픽에 오르고, 나의 블로그에 고정적인 서로이웃이 급증하였다. 고정적 방문객 수가 늘어 났다. 현재 조회수 평균이 50에서 100 사이이고, 방문자 수가 50명 선이다. 하나의 글에 평균 5개 정도의 공감 하트가 달리고, 가끔 댓글도 달린다. 그 정도의 반응도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다. 댓글과 공감 반응이 전혀 없는 블로그도 상당히 있다. 어쩌다 글을 쓰는 블로거만 그런 것도 아니다. 자기 딴에는 열심히 글을 쓰는데도 아무 반응 없이 홀로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 구독자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기적이 일어 났다. 두달 쯔음 꾸준히 글을 쓰던 시점인 10월 말에 연합뉴스TV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블로그를 보고 전화가 온 것이다. 다문화 여성인 아내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좋아서 다큐로 찍고 싶다고 했다. 그 프로그램이 다문화 가정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찍는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보지 않는 채널이어서, 보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다. 우리가 TV 나왔다고 연락하고, 유튜브 링크를 보내 주어야만 볼 줄을 알았다. 그런데 우리가 방송 소식을 알려 주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우리 방송을 잘 보았다고 연락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파트 주민 중 잘 모르는 사람 중에서도 우리의 방송을 보았다고 하는 분도 있었다. 연합뉴스TV도 보는 사람도 있고, 이 채널 저 채널 돌리다가 보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이웃집찰스 작가에게서도 연락이 와서, 아내와 함께 30분 동안 전화 인터뷰를 했는데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는다. 방송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방송은 에미마와 앞으로 달란트를 발위하여 잘 살면, 다음 기회가 반드시 온다.


나는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방송과 언론에서 인터뷰 따려고 찾아올만한 작가가 되고 싶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떼돈을 벌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추구하기 보다는, 재미와 감동을 추구하면 돈을 따라올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돈이 행복도 아니고 돈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 돈이 있어도 불행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행복은 마음가짐과 태도만 달라져도 얻을 수 있지만, 돈은 마음가짐과 태도만 가지고 벌려지는 것은 아니다. 노력을 한다고 돈이 벌리는 것은 아니라, 돈 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 되는 기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고 싶었다.


에미마와 내가 네팔을 떠나는 날, 우리 신혼집에 가족들과 교회 식구들이 아침부터 모여서 송별예배를 드렸다. 에미마가 한국으로 떠나는 것을 보며 모두 울었다. 나는 네팔 말을 몰라서 네팔에서 심심 했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네팔 사람들이 자기네들끼리 모였을 때는 네팔 말을 쓰지만 영어를 하면 잘 하기 때문에, 영어로 열심히 대화할 것을 하는 후회를 해 본다. 아내가 한국에서 홀로 외로워 보일 때, 나는 네팔에 아내와 함께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한국에서 살기 팍팍 하면, 네팔에 가서도 팍팍 하다. 한국에서 잘 사는 사람이 네팔에 가서도 할 일이 있고 잘 사는 것이다. 네팔이나 잘 살려면, 한국 만큼 소득을 얻으며 살아야지 살기가 괜찮다. 네팔 사람처럼 살면 기본 임금 자체가 낮은 데다가, 그마저도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직장을 잡기가 어렵다.


에미마가 나와 함께 한국으로 떠나는 날, 에미마 가족과 교회 식구들이 공항에 나와 모두 울었다. 대한민국 인천공항이나 김포공항에는 공항 내부에 아무나 들어가서 송별할 수 있는 공간도 있지만, 네팔 트리부반 국제공항 내부에는 비행기 타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 우리나라는 공항 내부에 비행기 타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지만, 네팔 공항에는 공항 내부 자체에 직원이나 탑승객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공항 밖에서 환송을 해야 한다.


에미마를 그리워 하고 우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네팔에서 에미마는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아파서 친구들이 없었다. 교회 사람들이 전부였다. 나는 건강해져서 예전의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지금부터 만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내 에미마와 에미마 부모님을 모시고 에버랜드에 간 이야기를 써서 네이버 핫토픽에 올라 갔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서 에미마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블로그에 쓴 것이 방송 외주제작사 작가 눈에 띄어서 연합뉴스TV 연중기획 하모니에 방송 되었다. 아내와 네팔에서 한달살기를 하고 싶다.그냥 놀러 갈 생각은 아니다. 에미마와 네팔에서 한달살기를 하면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글을 써서, 생산적인 컨텐츠를 생산하고 싶다. 그리고 세상에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생각의 정리와 구상을 하는 시간으로 삼기를 원한다. 2011년 말로 생각하고 있다.


에미마가 나고 자란 고향이자 부모님과 친지들이 사는 고향 너벌쁘라시에도 가고, 아내가 17살 때부터 살던 친구와 동료들이 있는 카트만두와 랄릿푸르에도 가고, 에미마 부모님을 모시고 포카라에 가서 히말라야 산맥을 구경하고, 히말라야 트래킹 코스 가운데 가장 쉽다는 오스트리안 캠프에 가보고 싶다. 놀러 가는 게 아니라, 그곳에 가서 블로그 글도 쓰고 싶고, 좋은 사진과 동영상을 남겨 오고 싶다. 팔에서 한달살기 하면서, 글과 영상의 콘텐츠를 남겨 와서, 콘텐츠를 돈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 중요한 이야기 하나 하자면, 전업작가는 접었다. 내가 베스트셀러 작가 되어서 글만 써도 떼부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직장생활 하면서 일과 후에 글을 쓰는 것으로 생각을 전환 하였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현재 나는 수원고용센터를 통하여 청년취업패키지로 구직활동 중이다.


여전히 나의 최종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다. 인기 유튜브를 하는 작가가 되는 것이다. 작가로 살기 위해서 언젠가는 1인 출판사 사장님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강남역 컴튜터학원에서 출판편집디자이너 과정을 배우고 있다. 이제 곧 북디자이너가 된다. 거의 끝을 향하여 가고 있다. 출판사에 취직하여 북디자이너를 하면서 출판인이 되어서 출판업계를 3년 정도 경험한 이후에, 1인 출판사를 차릴 수도 있고, 프리랜서가 될 수도 있다. 최종적으로 되고 싶은 것은 명확하다. 유튜브 하는 에세이 전업작가가 되고 싶다. 그러나, 이런 꿈이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날이 올때까지 호구지책을 해결할 직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8월 12일에 취업성공패키지 과정을 마치면, 일단 출판사에 취직하여 3년 정도는 출판사에서 일할 것이다. 그 후에도 전업작가로서 호구지책이 해결이 안 되면, 내 책을 내고 다른 사람의 책도 내 주는 1인 출판사를 내 집에서 차릴 계획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요, 인기 유튜버가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아내 에미마와 네팔에서 1달살기 하는 것이다. 아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년 시절 살던 카트만두에서 1주, 아내의 고향 너벌쁘라시에서 1주, 아내의 여동생이 가족과 사는 인도 나갈랜드에서 1주, 포카라에서 1주를 살고 싶다. 내 돈을 내고 놀러 가는 것이 아닌, 콘텐츠를 제작하려 출판사와 협찬사와 제작사를 끼고 대형기획으로 다녀 오고 싶다. 네팔에서 여행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면서 글도 쓰고 유튜브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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