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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Jun 06. 2021

옹달샘 시인

2015년 3월, 충주의 명상치유센터 <깊은산속 옹달샘>에 갔다. 옹달샘은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쓰시는 고도원 작가님께서 운영하시는 명상센터이다. 건강치유 프로그램 <녹색뇌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옹달샘에 갔다.


2014년 6월로 기억한다. '일신상의 사유'로 영어회화전문강사로 근무하던 초등학교를 그만두었다. '일신상의 사유'란 1학년 여선생이 예뻤다.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백 타이밍을 놓쳤고, 1학년 여선생이 나의 마음을 아는데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백 한 번 하지 않은 채 마음을 접었다. 1학년 여선생을 향한 나의 마음의 크기가 작아서는 아니었다. 안 되는 사랑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을 삶의 체험을 통해 이미 깨달은 이후였기 때문이다. 1학년 여선생의 마음이 나의 사랑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음을 알았을 때, 시도와 도전조차 하지 않은 채 사랑을 접었다.


1996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동아리 부회장이었고, 소녀는 동아리 회장이었다. 나는 소녀를 사랑했지만, 소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첫사랑 소녀를 향한 짝사랑은 상사병이 되었고, 상사병은 조울증이 되었다. 소녀가 내 마음을 떠나간 이후에도, 내 인생의 하나의 사랑을 찾아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했다. 첫사랑이 상사병이 되고, 상사병이 조울증이 된 나에게, 어떤 여자도 연민과 동정은 느낄지언정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 나의 모든 사연과 상황을 알면서도, 자신이 나를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치유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를 사랑해주고 나와 결혼해준 아내 에미마를 빼고는 그랬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극단적인 생각이야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수도 없이 많이 했지만, 극단적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학년 여선생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세상에 더 이상 살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첫사랑 소녀로 시작한 숱한 사랑의 실패로 면역이 생겨,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상은 넓고, 예쁘고 착한 여자는 많지는 아니지만, 어쩌다 한 명씩 있다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하나의 운명이 지나가면, 결코 자주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다른 운명이 언젠가 찾아온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운명이 나를 스쳐가는 것과, 내가 그 운명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1학년 여선생을 향한 마음은 바로 접혀졌다. 열일곱 살 때나, 스물한 살 때나, 그때는 그게 안 되었는데, 서른다섯 즈음되면 안 되던 게 된다. 다만, 다음날 학교에 출근하여 수업을 해야 하는데 수업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고, 학교 책상 위에는 업무가 쌓여 있었다. 내게는 짝사랑으로 이미 무너진 일상과 멘탈을 일으켜 세울 손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그다음 날 출근하지 않았다. 성격이 둥글고 둥글어 모질지 못한 탓에 삶과 죽음 사이의 강을 넘지 못했다. 그 주 남은 날을 병가를 내고 그다음 주 월요일 출근하여, 다른 생각하지 말고 눈썹 휘날리며 수업과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여름방학에 들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되지 않았다. 영어회화전문강사로 근무하던 학교를 그만두었다. 집에서 쉬며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 어차피 직장에 다니지 않을 때 마지막으로 약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조울증을 극복해 보자는 시도를 했다. 오래가지 않아 조울증이 재발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3개월 입원 후 퇴원하니, 조울증 증상은 가라앉았지만, 몸무게가 5kg 늘고 눈빛은 총기를 잃었다. 낮에 집에 혼자 있을 때는 거실에 나와 TV를 보고, 부모님이 집에 함께 계시는 밤에는 방에 들어가 인터넷을 했다. 조울증 증상은 조절이 되었지만, 한창 청년의 때에 그러고 있으니, 어머니께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셨다. 치료 이후 치유가 필요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하셨지 싶다. 큰고모의 추천으로 어머니께서는 명상센터 옹달샘의 <녹색뇌 프로젝트> 프로그램에 나를 2주간 동안 보내 주셨다.


프로그램은 좋았다. 혼이 나가 있던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을 뿐이다. 쏘쏘 So so. 그냥 그랬다. 프로그램 자체보다 쉬는 시간 친해진 참가자들과 무리를 이루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명상센터 뒷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재미있었다. 집에서 혼자 지내다 오래간만에 좋은 사람들과 만나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다함 씨, 혹시 외우는 시 하나 있으면 읊어보던가, 아니면 노래 하나 해봐요."

"외우는 시나 가사를 기억하는 노래는 없고요. 제가 아주 오래전 스물한 살에 지은 시가 하나 있는데요. 이 시를 가사로 자작곡도 만들었는데요. 그거 해봐도 될까요?"

"당연하지요. 더 좋지요."



저녁을 먹고 산행을 하다가, 어쩌다 나의 시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을 읊었고, 이 시로 만든 노래를 불렀다. 일행 "브라보"를 외쳤다.


그날 밤 고도원 작가님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한 명씩 돌아가며 마음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내 차례가 되자 같이 산행을 하는 일행이 내가 지은 시와 노래가 있는데 좋다고 한 번 들어보자고 했다. 고도원 작가님께서도 좋다고 해보라고 멍석을 깔아 주셨다.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다. 무대 앞에 나가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를 때, 듣는 관중보다 무대에 선 내가 더 큰 감동을 받았다. 닫혀 있던 내 마음이 열렸고, 나의 아프고 시린 사랑 이야기를 나누었다.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어쩌다 얼떨결에 '옹달샘 시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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