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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Oct 24. 2021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글을 쓴다

"형도 이제 아기가 생기니까 돈도 많이 필요하고. 나도 마침 사람이 필요하고."


그렇게 어쩌다 회사원이 되었다.


동생이 나를 불렀을 때는이미 더 이상의 취업과 구직 활동을 포기했었다. 어차피 안 될 취업 대신, 사실 나도 하고 싶지 않던 취업 대신, 집에서 글 쓰는 작가로 살기로 했다. 세상에 나는 오직 나 하나뿐이니, 나의 삶을 살아가며 글로 쓰면 돈은 따라오지 않을까? 브런치와 블로그에 글을 쓰고, 묶어서 종이책과 eBook으로 내고, YouTube를 하고, 강연과 북콘서트를 다니고, 상담과 컨설팅을 하고, TV 출연을 하고, 인세 수입뿐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하며 가치를 창출하는 작가로 살기로 했다. 돈 되는 책과 돈 버는 작가가 별로 없다지만, 내가 그 돈 되는 책을 쓰는 돈 되는 소수의 작가가 되기로 했다.


2000년 군대에서 시작된 조울증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해, 적절한 조절과 관리를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울증이 여러 번 재발하면서 직장생활을 오래 하지 못했고, 집에서 요양하며 소일하며 지냈다. 정년퇴직하신 아버지와 400시간 이상의 귀농교육을 받고, 논산 시골집에서 왕대추농장을 했다. 아버지께서는 왕대추농장을 나의 평생직장으로 만들어 주고 싶으셨고, 나는 단지 아버지의 노년생활을 곁에서 함께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는 반귀농 반귀촌의 낭만적인 시골 라이프로, 해가 없을 때 반짝 밭에 가서 일하고, 해가 있을 때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써서, 작가가 되어 시골을 떠나 다시 도시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왕대추도 나무라 몇 해가 지나야 수익이 나지만, 작황이 좋고 아버지 친구 중심으로 안정적인 판로가 있어 비전이 보였다. 아버지께서는 나와 아내 에미마의 평생 가정경제가 될 수 있을 규모로 농장을 확장시키시려는 꿈을 꾸셨다. 나는 여기 있다가 코가 꿰여 밤낮 쉬지 않고 일하는 농장의 소가 되고, 평생 농가부채에 깔려 죽겠다 싶었다. 아버지께선 돈이 있으셔서 농장을 확장할 생각을 하셨던 것은 아니고, 당시 아직 청년이었던 내가 청년 창업농에 선정이 되면, 최대 3억 원까지 저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돈으로 논과 밭을 사면 그게 자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셈법이었다. 특별한 직업과 소득 없이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살아왔지만, 평생 빚도 없이 살아왔던 나의 셈법으로는, 저리로 3억 원을 대출받아 논과 밭을 산다 하여도, 그저 무시무시한 농가부채일 뿐이었다. 왕대추농장의 아이템 선정부터 A to Z까지 모두 아버지로부터 나온 아이디어였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안 계실 때가 되면 나 혼자 농장을 일구어 나갈 각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나는 농부가 될 생각이 없었고, 아버지의 노후생활을 곁에서 함께 하고 싶었을 뿐이고, 농사는 시늉만 하고 글을 써서 작가가 될 생각이었다.


처음 몇 년은 들어가는 것만 있고 나오는 것은 없고, 그 이후에도 언제 손익분기점을 넘길지 확신이 없기는, 농사나 사업이나 집에서 작가가 될 때까지 글을 쓰는 것과, 내게는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다를 바가 없었다. 더군다나, 집에서 글을 쓰는 것은 농사와 사업과는 달라서, 빚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매달 생활비 외에는 달리 들어가는 돈도 없었다. 당장 돈이 되는 일도 아니지만, 돈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었다. 매달 필요한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그랬다. 당장 농사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농사를 짓나 글을 쓰나 어차피 부모님에게 생활비 타서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다를 바가 없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생각을 하고, 글감을 찾고, 글을 쓰는 삶이, 내가 보기에, 내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생산적인 활동이었다. 1년만, 아니 6개월만, 딱 3개월만이라도 아무것도 안 하고 오직 글쓰기에 올인할 수 있다면, 그저 내 삶을 살아가며 글로 쓰는 그 자체로 돈은 따라올 것 같았다. 어차피 뭘 해도 돈이 안 되는 것, 돈이 될 때까지 글을 써보자는 게 그때 내 심정이었다.


2020년 새해 벽두부터 수원고용센터를 찾아가, 취업성공패키지 직업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수원 집과 강남역 학원을 오가며 출판편집디자인 공부를 했다. 취업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따라 더 이상 농사짓지 않고, 집에서 글 쓰는 작가가 될 수 있는 여유를 얻기 위해서는, 생산적인 활동에 적을 걸어 두어야 다. 나는 직업 훈련을 받으며, 그 기간 동안 책 한 권 써서 작가가 되기로 했다.


하루 8시간 주 5일 수원역과 강남역을 오가며 출판편집디자인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 직장생활만큼 만만치 않았다. 책 한 권은커녕 글 하나 쓸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더 이상 다른데 메이지 않고 집에서 글 쓰는 작가로 살려고 직업훈련을 받기 시작했는데, 취업 상담과 훈련을 받다 보니 재미와 자신감이 생기고, 일단 작가로서 돈을 벌기까지 편집디자이너로 취업을 하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최선을 다해 출판편집디자인 과정을 이수하고 이력서를 뿌린 후에야, 컴퓨터 디자인 기술은 익혔지만, 디자이너로서 취업에 성공할 경쟁력에 이르지 못했다는 뼈 아픈 진실을 깨달았다. 재미는 있었고 최선을 다해 참여하였지만, 애초에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취업이 불가능한 종목이었다기술 그 자체와 취업에 성공할 역량 사이에는 다소 간극이 있다.


북디자이너로 출판사에 취업은 불가능하지만, 내가 쓴 책을 직접 편집하고 디자인해서 파는 1인 출판사를 하기로 했다. 북디자인이 가능하니 내가 할 수 없는 영역 빼고, 외주 주지 말고 다른 모든 영역을 나 홀로 하면, 최소한의 경비로 책을 만들 수 있다. 집에다 사업자등록을 하고, 인쇄-물류창고-유통은 원스톱 패키지로 업체에 맡기고, 기획-집필-편집-디자인-마케팅 등 그 외 나머지 모든 공정은 내가 직접 하면 된다. 출판인이 되고 싶은 마음보다, 평생 작가로 살기 위해 내 책을 내가 직접 만들어 팔기로 했다.


현실 대신 이상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유튜브를 하고, 활자 콘텐츠를 기반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작가로 사는 것이, 나에게 가장 현실적인 경제활동이라는 생각을 했다. 글 쓰고 책 내서 수익이 나는 작가가 거의 없다는 것은 통계를 가져다 대지 않아도 나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아주 단순 명료하다. 나는 상위 1%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작가가 되는 것이 목표기 때문에, 세상이 내가 바라는 대로만 돌아가 준다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꿈이 크고 야무지면 그 꿈을 현실로 만들 사람과 자본과 플랫폼이 붙기 마련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도서시장에는 스타 작가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내는 시스템이 있다. 나 자신과 시스템을 믿고 저 하늘로 몸을 던지면 날아오르지 않을까?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돈을 사랑하지만, 돈에 대한 욕심은 없다.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은, 아내 에미마와 아들 요한이와 집에서 함께 지내며, 글을 쓰며 내 삶을 살고 싶다. 작가로서 돈이 되면, 집에서 아내 에미마와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의 삶을 살아가며 그 이야기를 글로 쓰며, 평생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물적 경제적 토대가 될 것이다. 월급쟁이가 되면 평생 한 달 벌어 한 달 살아가지만, 세상이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면,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작가로서 내 삶을 살아가면 호구지책도 해결되고, 경제적 자유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안정된 가정생활과 경제생활을 위해, 나의 시간과 자유를 돈과 교환하는 게 아니라, 아내와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나의 삶의 이야기를 글로 나누면,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을까?


세상에 어떠한 역할 모델이 되고 싶다거나, 어떠한 일종의 문화혁명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세상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더라도, 그냥 세상에서 나 하나는 이렇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월급의 맛을 본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처음엔 돈 벌려고 동생을 따라나선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을 때, 형에게 일자리를 주고 싶은 마음으로 날 불러 준 동생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동생이 나를 필요로 할 때 도움의 손길이 되고 싶었다. 동생의 직원이 아닌, 동생의 형이 되고 싶었다. 물론, 당장 내가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가 와서 일 좀 같이하자고 했을 때 거부할 명분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동생 회사가 1인 기업에서 주식회사 법인 스타트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동생은 나를 정직원으로 채용했다. 동생은 회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직원이 필요하기도 했겠지만, 조울증으로 오랜 기간 백수로 지내는 나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은 부담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어쩌다 회사원이 되었다.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글을 쓴다. 일이 힘든 것은 아니다. 내 생각을 하고 내 글을 써야 할 시간에, 회사 생각을 하고 회사 일을 해야 한다는 게 고통스러웠다. 지금은 회사에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나는 집에서 글을 쓰며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스스로 아무 대책 없이 사표를 쓰고 나오겠다는 것은 아니다. 집에서 글을 쓰며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라는 것이지, 지금은 회사 사장인 동생이 나가라지 않는 이상,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닌 월급봉투의 무게 때문에, 당장 사표를 던지고 나올 수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의 글과 책이 빵 떠서 회사를 뜨는 것이다. 다니는 회사가 싫은 게 아니라, 나란 사람이랑 세상의 회사와 조직이랑 맞다. 내가 1인 출판사를 만들 생각을 했었던 것은, 출판인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작가로서 평생 글을 쓰며 살아갈 수 있는 성 하나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브런치에 글을 쓴다. 책 하나가 대박이 나거나, 대박은 아니더라도 중박이라도 나면, 그때 나는 더 이상 회사에 다니지 않고 아내와 아이와 함께 집에서 글 쓰며 살고 싶다.


어쩌다 회사원이 되었고, 다른 많은 회사원처럼, 월급봉투의 무게 때문에, 재미없고 행복하지는 않지만, 남편과 아빠로서의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회사원을 억지로 하고 있다. 빨리 글쓰기와 책 쓰기로 빛을 보아서회사원 그만 하고, 집에서 글 쓰는 작가로 살고 싶다.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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