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이 다가오는 왕대추 수확
한 달 예상하고 왔는데 두 주만에 왕대추를 다 따간다.
아내 에미마는 화수목 오전에는 논산다문화센터에서 온라인으로 하는 한국어 수업을 듣는다. 수원에서는 아플 때 빼고는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수업을 들었는데, 10월 한 달 논산에 부모님 왕대추농장 수확을 도와드리러 오면서, 부모님께서 하루 종일 쉬시지 않고 일을 하시는데, 한국어 수업을 듣는다고 할 수가 없어, 착한 아내는 말씀도 못 드리고 열심히 일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농사 일보다 며느리가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죄송하고 송구스러워서 시부모님께 말씀드리지 못하고 처음 한주는 한국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왕대추를 열심히 땄다. 나는 처음에는 한국어 공부에 그렇게 목 매일 필요도 없고, 아내가 농장 일을 즐겁게 한다면 그것도 괜찮겠다 하여, 그냥 아내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내에게 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내에게 한국어 공부하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려 한국어 수업을 듣게 한 것은 아니고, 화수목 3일 오전에는 한국어 수업을 들으며, 왕대추 수확과 집안 일로부터 쉬라고, 아버지 어머니께 아내 화수목에 한국어 수업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우리 부모님은 아들뿐만 아니라 며느리도 당연히 공부하는 게 있으면, 농장 일이나 집안 일보다 그 일을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드렸다. 내가 예상했던 부모님의 반응 대로, 아버지 어머니는 왜 말 안했냐고, 한국어 수업이 먼저이지 않느냐며 화수목 오전에는 아내가 한국어 수업을 듣게 배려해 주었다. 나는 아내에게 한국어 수업 들으라는 게 아니라, 한국어 수업을 들으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쉬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대신에 내가 농장에 나가 에미마가 할 몫까지 몇 배 열심히 정확하게 빠르게 왕대추를 땄다. 왕대추를 따고 집에 돌아와서 우리는 간식시간을 가졌는데, 소보로 빵과 아내가 좋아하는 믹스커피를 준비해서 아내에게 가져다주었다. 아내가 남편이 자신을 위해서 간식을 가져다주었다고 행복해했다. 아내 에미마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내가 아내를 위해 막일을 하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그 마음을 원하는 것이다. 내가 장염과 맹장수술로 입원하여 퇴원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나는 이제 퇴원했으니 괜찮겠다 싶어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일을 하고, 그런 모습을 아버지와 어머니는 흐뭇하게 보시는데, 아내는 좋게 보지 않는다. 아팠던 남편이 적어도 한 달은 쉬어야 하는데, 무거운 것을 들고 하루 종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가능하면 본인이 나 대신에 일을 하려고 한다. 나 또한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쉬면 아내와 어머니가 그만큼 많이 일 하고 적게 쉬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왕대추 농장과 집안일을 스스로 찾아 열심히 한다.
10월 한 달은 수확을 도와드리러 왔는데, 내일까지만 농장 일을 하고 토요일 저녁에 수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제 우리 부부가 도와드리지 않아도,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이서 충분히 수확을 하고 분류를 하고 배송을 하실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또한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내가 국비지원 직업교육이 끝나고 구직활동을 하면서 특별한 일이 없으니 내려오란 것이었지, 지금 내가 내 길을 찾아서 먹고살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을 보시고, 이번 주까지 왕대추가 어느 정도 따지면 올라가서 내 일을 하라는 뜻을 비추어 주셨다. 착한 아내이자 며느리인 에미 마는 안 된다고 왕대추 수확이 끝난 후에 가야 한다고 나에게 고집을 부렸지만, 내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이번에는 남편 말 들으라고 했다.
아내에게는 이제 내가 내 책도 써서 11월 1일까지 출판 프로젝트 공모전에 내야 하고, 또 내 책을 출판하며 다른 이의 책을 출판하는 내 1인 출판사 사업을 준비해야 한다고, 이제 우리 스스로 돈을 벌어서 경제적으로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 올라가자고 했지만, 사실 전부 변명이고 아내를 쉬게 하고 싶었다. 아내는 나와 둘이 있으면 쉬지만, 너무 착해서 아버지 어머니 부모님께서 시키지도 않는데도, 안 해도 되는 일을 만들어 하루 종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 물론 나와 부모님께서 중간중간 쉬게 틈을 만들어 주지만 그게 부모님께서 사시는 시골집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9월 27일 일요일에 추석을 앞두고 부모님 일을 도와 드리려고 일찍 논산에 내려왔는데, 배가 너무 아프로 설사가 멈추지 않아서 28일 오전 일찍 병원을 찾아갔더니, 1주일 간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심한 장염 증세를 판정받고, 어차피 빠른 시일 내로 맹장을 떼어 내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아, 병원에 입원한 김에 맹장까지 제거하였다. 추석 쇤 후에 부모님 왕대추 수확도 도와드리려고 논산에 내려왔는데, 정작 추석 내내 병원에 입원하여 지내다가 10월 3일 토요일 퇴원을 하였다.
보호자 아내 에미마와 아버지 어머니 외에는 코로나 때문에 면회도 되지 않아서, 가족들이 논산 시골집에 추석 쇠러 내려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논산 시내에 입원했던 나를 만나러 병문안 오실 수도 없었다. 10월 한 달과 11월 초까지 왕대추를 다 딸 때까지는 논산에 있을 예정으로 내려왔는데, 딱 2주 왕대추를 따니 이제 거의 끝물이 보인다. 아직도 자세히 살펴보면 열매가 어느 정도는 남아있지만, 우리 부부가 수원에 가도 아버지 어머니 두 분께서 충분히 마무리 지으실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땄다. 아버지 어머니도 내가 나의 첫 번째 책을 출간하여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해서 현실적인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더 이상 시골에서 일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 마음이 나에게 일하러 내려오라는 게 아니라, 부모님께서 보시기에는 도시살이가 쉽지 않으니, 시골에 내려와서 왕대추 농사를 짓거나 시골에서 일자리를 잡아서, 경쟁사회에서 탈탈 털리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마음으로 부르신 것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부모님의 마음은 그러하다. 그런데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논산 시골에서는 내가 꿈꾸는 비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작년 반년은 부모님과 아내와 논산에서 왕대추 농사를 짓다고, 올해는 나의 길을 모색하려고 직업교육을 받은 것이었다. 이제 나는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부모님을 떠나, 아내와 함께 우리의 길을 갈 때가 왔다.
우리 부부는 내일까지 부모님 왕대추농장 도와드리고 손 털고, 내일모레 토요일 부모님과 함께 전주 한옥마을에 놀러 갔다가, 토요일 저녁에 논산에서 기차를 타고 수원 집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착한 아내이자 며느리인 에미마는 아버지 어머니 두 분만 왕대추 수확을 마무리 지으면 안 된다고, 끝까지 함께하여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나는 에미마의 얼굴을 보면 에미마가 지금 이 일로 인해 행복한지 불행한지 읽을 수 있다. 착한 아내가 일을 하고 싶어 한다고, 일을 시키면 안 된다. 아내가 즐겁게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의 일이라면, 당연히 아내가 기쁜 대로 두지만, 남편인 내가 판단하기에는 이제 수원 집으로 돌아가 둘이 시간을 보낼 때가 되었다.
아무리 훌륭한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해도, 딸 같은 며느리고 친어머니 같은 어머니라도, 며느리는 며느리고 시어머니는 시어머니이다. 착하다고, 상대방을 배려한다고, 사랑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시어머니나 시아버지, 장인 장모님만 그런 것도 아니다. 장성하여 머리가 크면 친아버지와 친어머니와 같은 지붕 아래 살아가기도 힘든 것이다. 그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님도 우리가 있으니까 편해서 우리와 시골에서 같이 살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물한 살에 조울증이 걸려 20년 가까이 아파서 아직까지 변변한 직장을 잡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우리를 논산 시골집에서 품고 도와주면서 노후를 보내시고 싶으신 것이다. 내 그 뜻을 모르지는 않으나, 이제는 나와 아내 둘의 길을 갈 때가 되었다.
나도 부모님의 선한 마음을 알면서도, 그 방법적인 면에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작년까지는 현실적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리드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갔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았다. 아버지의 세계관과 내 세계관은 유사한 부분이 많으면서도, 완전히 판이하게 다르다. 아버지께서 내가 생각할 때 합리적이지 못한 비이성적인 생각을 하실 때, 지금까지는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씀드렸는데, 이제는 그냥 들어드리려고 한다. 물론 아직까지는 잘 안 된다. 아버지의 인생은 아버지의 인생이고, 아버지의 삶의 방식은 아버지의 삶의 방식이니,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은 이 길이다고 말씀드릴 필요가 사실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그 방식을 바꾸시면 더 좋은 효율성과 효과와 부를 창출한다고 하여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세계관의 한계에서 벗어나실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와 차근차근 선한 대화로 정말 훌륭하신 아버지인데도 불구하고 가지고 계신 한계에 대해 아무리 논쟁하고 설명해도, 그 변화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고 깨달았다. 아버지께서 내 인생에 대해서 이것은 이래야 한다고 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가치를 주장하실 때, 그 주장이 다를 때 지금까지는 아버지 생각은 존중하는데 내 생각은 이러하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게 먹히지 않고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너무도 훌륭하신 삶을 살아오신 나의 아버지의 세계관도 한계를 가진 것처럼, 내 세계관도 당연히 한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 사람 각자 각자의 세계관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 하나 남은 과제는 내 삶에 대한 아버지의 선한 마음으로의 태클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반박하지 않고 웃으면 들어 드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경청해서, 내가 생각하기에 맞다고 싶은 부분만 받아들이면 된다.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생각은 존중 하지만, 제 생각은 이래요 하는 대답이, 때로는 전달이 되지만 어떤 때는 아무리 말씀드려도 전달되지 않는다. 의사소통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열매로 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그것이 돈이 되지 않고 다른 사람만큼 독립적으로 살지 못하고, 인생의 패배자로 있을 때는, 그 말이 먹히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가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셔도, 내가 내 생각으로 아버지께서 기대하지 않으셨던 이상의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우리 부부가 행복하게 살고, 부모님께 선물 하나 사드리면 그때부터야 내 길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 자신의 인격은 인정하시나, 내 생각의 현실성과 온전성은 물음표를 가지고 계신다. 내가 조울증으로 아팠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나보다 부모님께서 더 잘 아시고 안타까워하신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사회에서 낙오된 게 아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영혼과 정신이 내 육체 밖으로 나가면서, 나는 빈털터리 패배자 낙오자가 되었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회복되어, 내가 건강하던 청소년 시절보다도 더 정신적으로 뛰어나고, 다른 어떤 사람 이상으로 온전하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회복탄력성을 얻었지만, 2030 청춘을 잃어버렸던 나는, 돈과 직업이 없는 빈털터리 백수로 살고 있는 것이다. 백수라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논 것은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동생 일을 도왔고, 아버지와 왕대추농장을 하며, 동생으로부터 아르바이트비를 벌고,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아 생활했다. 부모님과 동생의 도움을 받아 생활했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동생과 부모님이 도움이 필요하다가 할 때는 언제든지 내 사정보다 앞서서 가족을 도우며 살아왔던 것이다. 일을 할 수 없고 요양이 필요했던 나는, 집에서 요양하면서 부모님과 동생 등 가족의 일을 도우며 살 와왔던 것이다.
내일 밤이면 아내 에미마와 나는, 논산에서 부모님 농장 도와드리는 일을 마친다. 아내와 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 이상을 다했다. 우리만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부모님께서도 인정하셨다. 오버페이스를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는 열심히 살았다. 내일 하루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논산에서의 부모님을 돕는 일을 마치고, 토요일에는 부모님과 전주 한옥마을 여행을 갔다가, 저녁 기차로 수원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아내와 둘이서 당일치기로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강릉 안목해변의 강릉 카페거리에서 바다가 보이는 카페이서 아메리카노와 라테를 마시면서 하루 데이트하고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수요일에는 내가 대학생활을 했던 춘천에 가서, 현재 유일하게 교류하는 대학교 같은 과 친구를 만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