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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Mar 22. 2022

스물한 살, 군대에서 조울증에 걸렸다

조울증의 시작


스물한 살, 군대에서 조울증에 걸렸다.




2000년 1월 11일, 군대에 입대했다. 1월 10일이 내 생일이었다. 집에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며칠 집을 나갔다가, 군대 가기 바로 전 날이자 내 생일날, 집에 들어왔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내가 군대 가는 날까지 집에 안 들어올까 봐 걱정하셨지만, 내 입장에서는 집 나간 게 아니라, 군 입대 전 혼자 여행을 갔을 뿐이었다. 다만, 누구에게도 아무 말하지 않고 떠났을 뿐이다.


어언 20년도 더 지난 일이라, 그때 여행의 경로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다니던 대학 강원대가 있던 춘천에서 출발하여, 버스를 타고 강릉에 갔고, 강릉에서 버스를 타고 동해에 갔고, 동해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갔고,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수원 집으로 돌아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는 사람도 만나고, 바다도 봤다. 모텔 등 숙박업소에서 잔 것은 아니다. 버스 기차 PC방에서 잤다.


군대 가는 날 쨀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군입대 전날이자 내 생일인 1월 10일 날 집에 돌아올 계획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는 1980년 1월 생이다. 빠른 생일이라 79년 생과 초중고를 다녔고, 1년 재수를 해서 80년 생과 99학번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보통 과 동기들은 2학년 마치고 또는 그 이후에 군대에 갔는데, 나는 1학년 마치고 갔다. 재수를 했지만 빠른 생일이었기 때문에 영장이 나와서 간 것은 아니었고, 나 스스로 자원입대했다. 군대에 자원입대한 이유는, 군대에 간다고 하면 짝사랑 소녀가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함께 마셔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학교 같은 동아리라 고1 때부터 알고 지냈지만, 소녀가 나에게 꽃이 되어 의미가 된 것은 고2 때부터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중에서


고2 때 나는 동아리 부회장이었고, 소녀는 회장이었다. 소녀를 짝사랑한 지 1년이 되어갈 무렵 소녀에게 고백을 했고, 소녀는 진지하게 만나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했다. 사랑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작되었듯, 나는 내 의지로 그 사랑을 멈추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고3이 되어 동아리 활동이 끝나고, 졸업을 하고 둘 다 다른 곳에서 재수를 하고, 먼 곳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어, 더 볼 수도, 연락할 수도, 없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소녀를 그리워하고 짝사랑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데 말이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김광석


군대 간다고 하면, 카페에서 소녀와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토록 보고 싶어서, 병무청에 자원입대를 신청했다. 진지하게 만나던 남자 친구가 있던 소녀가 나를 만나줄리는 없었다. 소녀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털어버리기 위해, 군 입대 전 홀로 여행을 떠나 바다를 보고 돌아왔지만, 그리움은 쌓일 뿐 한 터럭도 털어버리지 못했다. 소녀를 향한 사랑이 시작되고, 소녀가 잊히기까지, 7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오 네가 보고파서 나는 어쩌나
그리움만 쌓이네

노영심




나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생활을 했다. 군사훈련도 논산이 아닌 양구의 사단 자체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다. 1월의 강원도 양구는 정말 추웠다. 식판과 수저를 물로 씻고 밖으로 나가면, 그 자리에서 바로 얼어버렸다. 훈련소 생활은 힘들었지만, 같은 기수 동기들끼리 같이 내무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재미있었다. 잘못해서 교관이 갈궈도, 같은 동기 훈련병들이 전우애 동기애로 이해해주고 격려해 주었다.


신병교육대 훈련을 마치고 배치받은 자대는 지옥이었다. 고참들은 시종일관 갈궈댔다. 양구의 겨울 날씨는 정말 추웠고, 매일 양구의 산을 타 다니며 훈련을 했다. 배치받은 자대는, 매일 양구의 험준 산령을 타 다니며 매복 훈련을 하는 보병부대였다. 몸이 힘드니, 부대원들은 항상 날이 서 있었고, 얼이 빠져있던 채로 입대한 나는 그들의 먹잇감이었다.


처벌을 받아 영창이나 군기교육대에 가도 좋으니, 부대를 옮겨달라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내가 소원수리를 올렸다면, 나는 신병이었기 때문에 징계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대와 선임병들이 곤혹을 치루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말자. 나 혼자 아프자. 그런 생각이 든 바로 다음날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선임병들은 나에게 빽이 있냐고 물었다. 나에게 빽이 있었다면, 할아버지 지인으로, 자대 배치받고 바로 군부대 공중전화로 집으로 수신자 부담 전화를 걸 수 있었던, 겨우 그 정도의 빽이었다.


사단보충대로 전출이 났다. 사단보충대는 군 휴양소라고 보면 된다. 주로 논산에서 훈련받고 사단에 배치받은 신병들이 며칠 묵고 가는 곳이다. 군 훈련소 관리병이 되었다. 당시 사단보충대는 높으신 분 자제들이 빽 써서 오던 부대 중 하나이기도 했던 것 같은데, 사고가 나서 부대 자체를 해체하고, 사단 내에서 계급 별로 다시 뽑은 것이다.




일 자체도 쉽고, 선임병도 나를 아들처럼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간지 일주일도 안 되어 조울증에 걸렸다.


새 부대에서 행정병을 자원해서 맡았는데, 부대원 수만큼 다이어리와 문구용품을 문구점에서 샀다. 부대 운동장을 중얼거리면서 빙빙 돌았다. 며칠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했지만, 피곤하지 않았고,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불행하던 나는 행복해졌다. 세상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개발했다. 내일 우리 모두가 총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개발했다. 위에 보고를 하면, 저 위 청와대에서 나를 부르러 올 것이라 생각했다. 중대장이 나를 불렀다.


"다함아, 좋은데 가자."


차에 나를 태우고 어디론가 갔다. 중간에 편의점에 들려,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사라고 했다. 제일 비싼 음료수 하나를 골랐다. 그 길은 청와대가 아닌, 군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2000년 1월에 입대해서, 6월에 의가사 전역했다. 나는 만기 전역을 하고 싶었지만, 군대에서 제대를 시켰다. 군대는 가기 싫어도 가야 하지만, 있고 싶다고 있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군 생활 기간이 길지 않아서였는지, 군대에서 빤스 한 장, 양말 한 켤레, 전투화 하나 가져오지 못했다. 군병원 퇴원이 전역이었는데, 전부 어머니께서 가져오신 것으로 갈아입고 퇴원했다. 군대의 먼지 하나 집으로 가져오지 못했다. 상병 때 조울증에 걸려 전역해 많지는 않지만 군에서 보상을 받았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던데, 나는 군입대 3개월 정도에 조울증에 걸려, 군입대 6개월도 안돼 전역을 해서, 국방색 빤스 한 장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


제대할 때 군의관이 어머니께 3년은 절대로 약을 끊지 말고 먹어야 된다고 했다는데, 나도 부모님도 조울증을 잘 모를 때라, 약을 먹고 끊고 괜찮다 심란하다를 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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