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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Apr 07. 2022

돈도 직장도 아무것도 없이, 나는 에미마와 결혼했다

더더욱이 조울증을 달고 말이다


나는 아내 에미마와 아무것도 없이 결혼했다. 돈도 없었고, 직업도 없었다. 아내 에미마를 알고 카카오톡으로 사귀게 되었던 2018년 5월 경에는, 2000년 봄 군대에서 조울증에 걸린 이래로 18년이 되던 때였다. 서로 카카오톡으로 랜선 연애를 하고, 네팔에서 그해 9월에 양쪽 부모 상견례 겸 약혼을 하고, 그해 12월 결혼을 했는데, 나와 에미마가 만나서 인연이 생기기 전에, 어머니께서 소개하는 분을 통해 나의 조울증과 모든 상황을 에미마에게 가감 없이 전달했다. 물론,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아파서 그렇고, 믿음과 사랑으로 회복되면 예전의 훌륭한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어머니의 기대를 담아서 전달하셨을 것이다.


아내는 원래 국제결혼 생각은 없을뿐더러, 한국 남자랑 결혼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아내 주변의 한국사람들은 가족보다 더 가족 같고 훌륭한 분들도 있었지만, 아내가 네팔에서 보고 들은 코리안 중에서는 어글리 코리안 개자식들도 많았다. 아내가 네팔에 있을 때부터 곁에 좋은 한국인 지인들이 많았지만, 주변에서 한국인 개자식들의 풍문을 듣고 보았다. 아내와 내가 결혼을 결정하고, 결혼 수속을 위해 아내가 주한 네팔 대사관에 문의 전화를 했는데, 대사관에서 왜 한국인 남자랑 결혼하려고 하냐고, 나쁜 남편 나쁜 시어머니 만날 수 있다고, 말리며 경고를 했다고 한다.


우리는 온오프라인으로 사귀어 보고 결혼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서로에 대한 소개를 전해 듣고, 사진 정도 교환하고, 아내는 기도하고 나는 생각하고, 그런 후에 결혼을 하기로 결정한 후에, 카카오톡으로 랜선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네팔 카트만두에서 아내 에미마와 처음 만난 날, 우리는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우리를 소개해주신 네팔에 거주하시는 한국인 부부와 동석하여, 약혼식을 하고 그다음 날 우리 부모님과 함께 히말라야 트래킹 관광도시인 포카라로 약혼여행을 갔지만, 카톡으로 랜선 연애를 하기 이전에 우리는 결혼을 생각했고, 카톡을 통하여 랜선으로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


아내 에미마는 나에게 돈도 직업도 없고, 내가 조울증이 있어도, 자신이 나를 사랑해주면, 하나님께서 나를 치유하시고, 돈과 직업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아내 에미마는 한국에서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네팔보다 한국이 훨씬 돈이 많고, 네팔에서도 돈이 중요하지만, 한국에서는 돈이 없으면 이 정도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관념이 에미마에게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채워주실 것이라는 에미마의 믿음도, 사랑과 믿음으로 살면 기본은 채워질 것이라는 착각과 타문화권에 대한 몰이해가 바탕이었을지도 모른다.


양국에 혼인신고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물론, 한국에서는 한 시간이면 끝나고, 네팔에서는 하루 종일 걸릴 수 있다. 그렇지만, 혼인신고 자체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결혼비자를 얻는 것이다. 네팔인 아내가 내가 있는 한국에 와서 살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결혼비자를 받아야 한다. 비자도 1년 또는 2년 단위의 비자를 주는 것이 아니라, 3개월 정도의 비자를 내주면, 그것을 한국의 출입국관리소에 가지고 가서, 외국인 등록을 해서 1년 또는 2년 또는 다년 단위로 갱신을 하는 것이다.


외국인 배우자가 한국에 오기 위해서는 한국어를 해야 한다. 물론, 아주 기본적인 회화 의사소통 능력을 요구한다. 나라에 따라 다른 것 같은데, 한국어능력시험 TOPIK 급수를 요구하는 대사관도 있고, 대사관 자체에서 별도의 한국어시험을 보는 대사관도 있다. 주 네팔 한국대사관에서는 결혼 이민자에 대한 한국어 시험을 직접 대사관에서 보는가 보다. 그런데, 그 시험이 한국어능력시험보다 훨씬 쉽기도 하고, 결혼 이민자에게 요구하는 한국어 능력은 외국인 노동자에게 요구하는 한국어 능력보다 훨씬 쉽다.


한국인 배우자가 외국인 배우자를 한국에 데려오기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 경제력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아내가, 한국에 와서 당장 맞벌이를 할 것도 아니고, 나와 부모님도 아내에게 맞벌이를 시킬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나는 대신 부모님이 보증인이 되었다. 부모님이 아들이 국제결혼할 때, 아들이 경제력이 되지 않을 때, 어느 정도 이상의 경제를 뒷받침해주겠다고 소명을 하면, 그게 절차에 따라 받아들여지면 결혼비자가 나올 수 있다.


외국인 배우자가 한국에 거주기간이 기준 이상이 되어 귀하 요건이 될 경우에, 두 부부의 경제력이 일정 수준이 되지 않으면, 부모님이 아무리 보증을 해주시고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셔도, 외국인 배우자가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없다. 물론 외국인 배우자는 한국인의 배우자이고, 한국 국적 자녀의 부모이기 때문에, 일반 외국인 노동자나 체류자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는다. 년수에 상관없이 계속 한국에 있을 수 있다. 불편함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같이 장모님 장인어른 뵈러 네팔을 방문할 때, 공항 출국장에서 따로따로 들어오고 나와야 한다. 물론, 바로 다시 만나지만 말이다. 둘이 제주도 여행을 가도, 둘이 들어가는 게이트가 다를 수 있다. 일반 외국인 노동자에게 나오지 않는 코로나 지원금 같은 한국 국민에게 주는 혜택도, 한국인의 외국인 배우자 같은 경우는 대게 받는다.


지금은 직장에 다니지만, 수입이 없을 때는 부모님에게 용돈을 타서 썼고, 부모님 아파트에서 살았다. 지금은 부모님께서 시골집에 내려가 농사짓고 계시고, 나와 아내 둘이서 부모님 집에서 아들 요한이랑 산다. 부모님께서는 어쩌다 한 번 일이 있거나 하시면 수원 집에서 쉬시다 가신다.


현재로서는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주 40시간 정규직으로 일하며 월급을 받고, 동생 부부가 간간히 아들 요한이 옷이나 장난감 때로는 유모차 같은 것을 선물로 주고, 부모님 아파트에 살며 부모님께서도 요한이와 우리 부부를 위해서 이것저것 챙겨주신다. 현재 월세와 관리비를 드릴 수 없는 우리는, 대신 많지는 않지만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우리 형편에서 최대치를 용돈으로 드린다. 네팔 부모님께 드리는 월 20만 원과 같은 월 20만 원을 논산 부모님께 드린다. 외벌이로 월급이 200 정도인데, 그 정도면 적지 않은 액수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재로서는 크게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산다. 우리 부부가 사 준 요한이 장난감은 없는데, 우리 집에 있는 요한이 장난감은 넘쳐날 정도로 많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선물이다. 신상품도 있고, 새것 같은 중고도 있다.


물론, 그 정도 가지고 현재 돈으로 시험 들지 않는 것은, 부모님 아파트에서 부모님 냉장고를 파 먹으면서 살고, 동생 회사에 다니며 월급을 타고, 우리 부부와 아들 요한이를 사랑하는 도움의 손길이 있어서인 것도 맞다.


아내와 결혼한 후에도, 한창 동안 특별한 직장과 수입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우리 부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귀농하신 부모님 농장에서 농사를 했고, 2주일에 한 번 씩 동생 회사에 가서 청소를 했다. 다만, 돈이 안 되었을 뿐이다. 한 달 벌어 한 달 살 수 있는 벌이가 없으니 그게 힘들었다. 특히 나보다 아내 에미마가 힘들어했다. 부모님에게 타서 쓰는 것도 눈치 보이고, 우리가 필요한데 돈을 써도 가난한 우리가 여기 돈을 써도 되나 자기 검열에 들어가게 되고, 부모님과 동생 부부 등 평소 우리에게 사랑을 준 분들에게 보답을 할 수도 없고, 그런 게 아내 에미마는 힘들었다. 지금도, 내가 번 돈으로만 온전히 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일단은 부모님에게 타지 않고, 내 월급으로 공과금도 내고, 식자재도 사고, 배달의민족으로 배달도 시켜 먹고, 쿠팡 네이버쇼핑 홈쇼핑 등으로 인터넷 쇼핑도 한다. 부모님께서 아파트 공과금이나 보험금은 일부 내주시지만, 지금은 내가 번 돈으로 생활을 하고, 내 돈을 한 달에 10만 원씩 주택 청약금도 붓는다. 돈 모아서 아내와 이야기를 해서, 올해 어머니 칠순 생신 때는, 디지털 드로잉 하시며 그림 그리시라고, 어머니께 아이패드 에어4를 사 드렸다.


물론, 내가 아내를 만나서 회복되기 이전에, 니트족으로 부모님께 용돈 타서 살려고 그렇게 산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조울증으로 방황했고, 그 가운데 경력이 단절이 되었고, 멀쩡해졌고 노동력은 있었지만 일을 할 수 있는 데가 없었고, 어디로 가야 일을 찾을 수 있는지도 몰랐다.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과 간절함도 없었고 말이다.


어쨌든, 2018년 12월 아내 에미마와 결혼하고, 2019년 상반기에는 아내와 네팔에서 신혼생활을 하고, 그해 하반기에는 논산에서 부모님과 왕대추 농장을 하고, 2020년에는 국비지원으로 직업훈련을 받고 구직활동을 하고, 2021년부터는 동생 회사에서 일하며 한 달 벌어 한 달 살고 있다. 집에서 글 쓰고 유튜브 하며 전업작가로서 사는 게 꿈이지만, 그게 될지 되지 않을지 모른다. 낭만으로서의 작가로서의 삶을 꿈꾸는 것은 아니고, 작가로서 집에서 글 쓰며 그게 호구지책 직업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는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될지 안될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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