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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Apr 09. 2022

아내 에미마와 아들 요한이와 어머니와 지인 결혼식에

아내 에미마와 아들 요한이와 지인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오늘 결혼한 신부는 나와 에미마를 소개해 주신 분의 딸이다. 나와 에미마를 소개해 주신 분을 아내는 '앤티'라 부르는데, 아내에게 정신적인 어머니 같은 분이시다. 아내 에미마가 '앤티'를 알고 있었고, '앤티'가 우리 고모를 알고 계셨다. '앤티'는 한국분으로서, 부부가 오랫동안 네팔에서 비즈니스와 봉사활동을 하고 계신다.


아내는 '앤티'도 잘 알고 있었지만, '앤티'의 딸인 신부도 잘 알고 있었다. 신부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왔지만, 어린 시절 네팔에 있었고, 그때 에미마랑 언니 동생으로 잘 알고 지냈다. 나도 신부를 본 적이 있다. 아내와 나의 한국 결혼식 때 왔다. 아내와 나는 2018년 12월 네팔에서 결혼식을 하고, 아내의 결혼비자 수속을 하고 이듬해 2019년 5월에 한국에 들어와 6월 수원에서 한국 결혼식을 한 번 더 했다. 신부는 한국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던 중이라, 한국 결혼식에 왔다.


결혼식은 안양 명학역 근처에 웨딩홀에서 했다. 그 웨딩홀은 9층 건물을 통째로 쓰나 보다. 건물구조가 특색이 있다면, 1층이 로비이고, 웨딩홀 컨벤션은 5층 ~ 9층이고, 지하 1 ~ 2층, 지상 2 ~ 4 층이 주차장이었다. 우리는 주차 공간이 여유로워 좋다는 느낌을 가졌는데, 엘리베이터에 탄 우리가 모르는 다른 손님은 그렇게 중간층을 통째로 주차장을 쓰면 차량 무게를 건물이 버티나 걱정을 한다. 나는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게, 주차 빌딩도 있는데 말이다. 상가 오피스텔 안에 주차공간이 결합된 빌딩도 있는데 말이다. 이미 그런 공법이 있는데 말이다. 이럴 때 두고 하는 말이, 걱정도 팔자다.


코로나 시국에 아들 요한이를 데리고 결혼식장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세 식구와 어머니는 이미 코로나를 한 번 앓고 나서 면역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꼭 가서 축하해 주어야 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안 갔을 것이다.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에 가까운 분이기에, 참석했다. 아내 에미마가 가는데, 내가 안 갈 수 없고, 에미마와 내가 가는데 아들 요한이를 두고 갈 수 없고 말이다. 또 아들 요한이는 신부의 어머니와 신부의 기쁨이기도 하고 말이다.


수원에서 안양 먼 거리는 아닌데 교통체증으로 차 안에서 오랜 시간과, 예식 내내 긴 시간, 그리고 식사를 하는 동안, 우리 아들 요한이는 착하게 씩씩하게 잘 버텼다. 요한이는 엄마 에미마와 항상 같이 시간을 보내기 때문인지,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어서 그런지, 다른 아이들보다 착하고 덜 칭얼댄다. 물론,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울어서 표현하는데, 그것은 모든 아기들의 표현방식이고 말이다. 아들 요한이는, 착하고 똑똑하고, 키도 크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고, 기어 다니기도 엄청 잘하고, 벌써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려고 한다. 이걸 전문용어로 팔불출이라고 한다. 팔불출이기는 한데, 거짓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우리를 수원 집에 내려놓고, 서둘러 논산 시골집으로 내려가셨다. 이번 주말 논산에 지인 두 분의 초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친척 분이 돌아가셨고, 시골집의 옆 동네 교회 직전 목사님이 돌아가셨다. 얼마 전 돌아가신 목사님은 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동네 목사님이고, 이번 주 돌아가신 목사님은 할아버지께서 다니시던 옆 동네의 직전 목사님이 돌아가셨다. 은퇴하시고 교회 동네에서 사셨나 보다. 친척 분은 나에게는 먼 친척 분이고, 아버지에게는 가까운 친척 분이시다. 할아버지의 형님이신 큰할아버지의 따님 분이 돌아가신 것인데, 나에게도 아주 먼 친척은 아니지만, 사실 나의 세대는 그 정도 분을 알고 지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성묘 때 멀찍이 뵙기는 했겠지만, 사실 대화 한 마디 해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를 알아도, 나는 그분을 모르기도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를 집에 내려 주시고 논산 시골집에 내려가셨다. 아내 에미마와 상의를 해서, 이번 달에는 부모님께 용돈 50만 원을 보내드렸다. 내가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부모님 집에 살면서 집세나 관리비는 못 드려도, 더 많은 도움을 받지만, 회사 다니면서 월급을 받으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월 20만 원 용돈을 보내드린다. 내가 돈을 벌기 전에는, 우리 부모님께 돈을 받아 네팔 장인 장모님께 월 20만 원 보내드렸는데, 이제는 양가 부모님께 월 20만 원씩 보내드린다. 이번 달에는 싱크대를 고치신다고 하여, 거기에 쓰시라고 50만 원을 보내드렸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엄청난 돈이기도 하다. 물론, 내가 돈을 벌지만 그 돈으로 우리 세 식구 못 산다. 부모님 아파트에서 부모님과 동생과 주변의 도움이 있으니 내가 혼자 벌어도 셋이 사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로 감사와 성의 표시를 하려고 한다. 50만 원 액수를 먼저 생각한 게 아니라, 평소에 20만 원 드리는데, 싱크대 고치는데 돈이 필요하다 하여, 얼마 정도 보내드려야 할까 아내와 상의하여, 50만 원을 보내드렸다. 어머니 아버지는 돈의 액수보다, 아들 며느리가 우리 형편에서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마운가 보다.


21살 때 군대에서 조울증에 걸려, 오랜 방황 끝에 결혼하고 조울증을 조절하며 극복하고, 회사에 다니며 내가 돈 벌어서 가정 경제생활하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그런 게 기쁘신가 보다. 물론, 아직도 부모님께서 많은 것으로 도움을 주시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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