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은 작가다. 아내 에미마와 아들 요한이와 함께 집이나 카페에서 글 쓰고 유튜브 하는 작가를 꿈꾼다. 지금도 브런치 작가이고, 나의 꿈도 브런치 작가이다. 다만 지금은 '돈 안 되는' 브런치 작가이고, 나의 꿈은 '돈 되는' 브런치 작가이다. 지금은 회사에 다니며 돈을 벌고, 그 돈이 가져다주는 자유 안에서 브런치에 글을 쓰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으로 돈을 벌고,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이 되었으면 한다. 브런치에 쓴 글을 스크립트로 하여 동영상으로 가공하면 유튜브가 되는 것이고 말이다.
작가로서 에세이를 중심으로 시 소설 드라마 노래 가사 유튜브 대본 등등 다양한 글을 쓰고 싶다. 사랑 조울증 글쓰기 육아 음악 정치 등등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고 싶다. 내가 쓰고 싶은 글쓰기의 다양한 주제 중 하나가 여행기이다.
내가 직업 작가가 되어야지 하고 각성한 것은 2015년 봄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의 글쓰기로 연결이 되는 각성은 2015년 봄이었다. 물론, 그때부터 바로 글을 쓴 것은 아니다. 그 각성으로부터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 시작한 것은, 2019년 8월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2020년 10월 브런치 작가가 되면서부터는, 나의 글쓰기의 무게중심이 브런치로 이동하였다.
2019년 12월 네이버 블로그에서 공모한 #소원을말해봐 블로그 포스팅 이벤트에 1등 Best of Best에 당선되어 네이버페이 200만 원을 받았다. 소원지원금 200만 원을 받으면 이루고 싶은 소원을 블로그 글로 쓰는 것이었다. 나는 네이버포인트 200만 원인 줄 모르고, 현금 200만 원을 주는 줄 알았다. 당시 네이버페이랑 네이버포인트를 착각했었던 것 같다. 현금 전환이 가능한 네이버페이 200만 원을 준다는 줄 알았는데, 네이버쇼핑에서만 쓸 수 있는 네이버포인트 200만 원이었다.
200만 원 타면 이루고 싶은 소원을 쓴 게 아니라, 200만 원짜리 공모전에 다른 경쟁자를 이기고 200만 원을 탈 수 있는 소원을 썼다. 2000만 원은 들어갈 소원의 시드머니를 소원으로 쓴 것이다. 나의 삶의 스토리와 일치된 주제로 말이다. 단순히 어려운데 도와달라 이런 것은 큰 감동이 없다. 작은 상금은 탈 수 있어도 큰 상금은 타기 힘들다. 나는 아내 에미마를 만난 사연, 에미마를 만나기까지 나의 스토리, 그리고 아내 에미마의 고향 네팔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싶은 소원을 썼다. 아주 없는 소원을 거짓말로 쓴 것은 아니다. 언젠가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이기는 하다.
언젠가 아내 에미마랑 아들 요한이랑, 네팔에 계신 장모님 장인어른을 모시고, 인도의 에미마 동생과 아들 딸을 불러서, 마이크로버스 한 대 빌려서, 한 달 동안 네팔 여행을 하고 싶다. 며칠은 아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17살부터 지낸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지내고, 며칠은 아내의 고향에서 지내고, 며칠은 히말라야가 있는 포카라를 여행하고 싶다.
내가 번 돈으로만 가기는 어렵고, 내가 유명 작가가 되고 유명 유튜버가 되면, 후원을 받거나 아니면 유튜브 콘텐츠 촬영으로 가면 된다. 또, 유명 작가가 되면, 네팔에서 한 달 살기로 책 한 권을 쓰면 된다. 출판사와 기획을 하고 지원을 받아서 가면 된다.
작가가 초기에 잘 쓸 수 있는 글이 있고, 작가로서 유명세나 돈이나 무엇을 이루어야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자기가 그동안 살아온 인생에 대한 글은, 첫 책이 가장 잘 쓸 수 있다. 시간이 지나 작가로서 경륜이 생겨도, 첫 모든 것을 쏟아 쓴 첫 책을 넘어설 수 없는 주제가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녹인 책일수록 그렇다. 그렇지만, 어떤 주제는 작가로서 시작할 때 쓰기 힘든 주제들이 있다. 현재 나처럼 경제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아내와 요한이와 다니는 여행기 같은 주제는 어려울뿐더러, 지금 쓸 수 있는 여행기는 소박한 여행기일 수밖에 없다. 대형 기획을 위해서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야 하고, 나의 글로 먹고사는 팀과 생태계가 형성이 되어야 한다. 나의 독자 팬층도 두터워야 하고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나 스스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중고등학생 때까지는 해외에 나가본 적도 없고, 여름 바캉스 피서라고 정해두고 간 여행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아버지는 초등학교 부부교사로서 칼퇴근을 하시고, 주말과 방학의 개인 시간이 보장이 되었기 때문에, 평소에 국내에 여기저기 많이 데리고 다니셨던 것 같다. 다만, 그때는 그것을 여행이라고 느끼지 않았던 것뿐이다. 더더욱이 그랬던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영흥도에서 4학년에서 6학년까지 백령도에서 살았는데, 섬에서 낚시 다니고 가족끼리 낙지 잡으로 다니고 그랬던 것을 그때는 여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 제주도 여행을 갔던 것은, 내 기억에 아마도 2014년 1월로 기억한다.
보통 여행 다닌다 하면 해외여행을 말하는데, 나는 내가 해외여행 별로 안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도 나름 해외여행을 했다.
2001년도였던 것 같다. 춘천에서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목사님들과 북한선교 여행을 하신다고 중국의 북중 국경지역으로 선교여행을 가셨는데, 같이 갈 교인을 모집했는데, 내가 따라갔다. 사실 교인들은 거의 없었고, 목사님들과 같이 다닌 여행이었다. 사실 대단히 비밀리에 간 여행이었다. 백두산도 가고,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곳도 가고 그랬지만, 탈북민이 숨어 있는 곳에 가서 탈북민을 만나는 여행이었다. 북한선교대학이라고 북한선교를 위한 목사님들의 공부모임에서 일종의 체험학습을 간 것인데, 내가 따라간 것이다. 탈북민을 대상으로 전도나 구조를 위해 들어간 전문팀은 아니었고, 북한선교에 대해 공부하신 목사님들이 실제 현장을 보기 위해 탐방 차 간 여행이었다. 어쩌다, 나도 그곳에 가게 되었다.
2005년도였는지 2006년였는지 그때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옮겨간 춘천의 다른 교회에서, 태국으로 단기선교를 갔다. 사실 1주일 단기선교는 선교라고 말할 수는 없고, 미션트립이다. 선교는 아니고 선교 여행이다. 태국은 치앙마이 치앙라이 지역으로 갔는데, 일반 태국민을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태국에 라후 부족이라고 산에 사는 소수부족 산족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지에 갔다. 라후 부족이 사는 마을에는 마을에 전기가 없다. 마을뿐 아니라 그 근방에 전기가 없다. 그래서 밤에 해가 떨어지면, 주변에 인공 불빛이 하나도 없어서, 별이 정말 많다. 산족이 산에 나무로 집 짓고 사는 부족이다. 선교 센터는 마을 밖에 도심지에 있고,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서 공부도 시키고 지도자로 키우기도 하고, 마을로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도 산 마을에서 하루 이틀 자면서, 원시에 가까운 곳에서 체험을 했다. 아주 홀랑 벗고 중요 부위만 나뭇잎으로 가리는 그런 정도의 원시 부족은 아니다. 어디서 주워 입었는지, 눈높이 수학이라고 쓰여 있는 허름한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그런 부족이다. 전기도 없고, 나무로 집 짓고, 그렇게 사는 부족인데, 그래도 위아래는 입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아주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하지는 않는다. 태국에서 일반 관광과 쇼핑은 일정이 끝나고 출국하는 날 공항에 가기 전 잠시였고, 우리는 태국에서 태국인이 아닌 라후 부족을 만났다.
여행다운 여행이라면 고도원의아침편지 아침편지여행에서 간 <2015년 동유럽 & 지중해 배낭여행>이었다. 말이 배낭여행이었지, 4성급 5성급 호텔에서 투숙하고, 대형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이동한, 럭셔리 패키지여행이었다. 단순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고도원의아침편지를 쓰시는 고도원 작가님께서 진행하시는 명상치유 여행이었다. 여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유럽 지중해의 풍경을 배경으로, 명상 프로그램도 함께 진행하는 여행이었다.
2014년도에 조울증이 재발하였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했다. 큰 고모의 추천으로 어머니께서 고도원 작가님께서 충주에서 운영하시는 명상센터 <깊은산속 옹달샘>의 명상치유 프로그램에 보내주셨다. 그 프로그램이 여행은 아니었다. 명상치유 프로그램을 통하여, 몸과 마음이 회복이 되었는데, 명상센터 직원인 아침지기가 예뻤다. 그런 이유로 그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 깊은산속옹달샘에서 한 달 동안 숙식하며 자원봉사를 했고, 옹달샘에서 가는 아침편지 여행에 갔다. 그 아침지기가 명상센터의 여행 프로그램 담당자이기도 했다. 다만, 그해 산티아고 순례 여행이 새로 시작이 되어, 그 아침지기는 거기를 아느라 내가 신청한 동유럽 & 지중해 여행에 가지 않았다. 엇갈린 인연이었다.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명상센터의 명상치유 프로그램 기간에, 나는 직업으로서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각성을 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을 여러 번 했고, 대학을 다닐 때도 국문과의 문예창작과 문학 수업을 여럿 듣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작가로서의 꿈의 씨앗이 심긴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여러 개의 동기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각성이 그때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그때 아침지기에 눈이 멀기 보다도, 옹달샘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명상치유센터 옹달샘에서 가는 동유럽 & 지중해 명상치유 여행을 통하여, 책 한 권의 글을 써야 했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때 나는 작가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 스스로 작가의 길로 가기에, 나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로 했다.
695만 원을 내고 동유럽 & 지중해 15박 16일 럭셔리 여행을 갔지만, 사실 배우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기고 그렇게 여행을 하지는 않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공부를 하고 가서, 내가 보고 싶은 곳을 더 보고 오고 그러지도 않았다. 그냥 동유럽 & 지중해 여행을 동네 마실 다니듯 다녔다. 프로그램 진행대로 따라다니면서, 내 생각에 빠져 있고, 자유시간이 있으면 카페에 가서 커피나 마시고 그렇게 보냈다. 물론, 대개는 전체 일정이 있었고, 자유 일정도 팀원들끼리 같이 다니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실, 당시 내가 돈을 벌고 있지도 않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돈도 없으면서, 학생이나 백수 치고는 꽤 많은 용돈을 가지고 갔다. 물론, 아주 많은 용돈도 아니었지만, 어머니께서 여행 기간 동안 용돈으로 쓸만한 돈과, 교회 권사님이 좀 챙겨 주셨다. 그 용돈이라는 것은, 모든 일정의 돈은 이미 다 내고, 개인적으로 사 먹고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기념품 사고 그런 돈을 말한다. 사실 이미 돈을 다 냈기 때문에, 용돈이 없어도 상관은 없는 것이었지만, 또 여행을 재미있게 다녀오려면 가진 돈만큼 여유가 있었다. 참가자 중 교수님이나 의사나 그런 분들보다는 적은 용돈을 가지고 갔겠지만, 학생들과 비교해서는 그래도 적지 않은 용돈을 가지고 갔다. 정확히 얼마를 가지고 갔는지 기억에 나지는 않지만, 우리 돈으로 30만 원 이상은 가지고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때 내가 조울증 증상이 조금 있을 때였다. 조울증 증상 중 하나는 순간에 가진 돈을 다 쓸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돈을 많이 쓰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의 16일 일정 중 5일 차 즈음 어디에 돈을 썼는지 지금에 와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가진 돈의 거의 전부를 다 써 버렸다. 앞에 5일에 나누어 쓴 것이 아니라, 5일 차 하루에 다 써 버렸다. 그래서도 나는 일행들과 더 친하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명상치유 여행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엄격하게 프로그램 끝나고 음주를 금했다. 그렇지만, 일정 끝나고 다 알아서 끼리끼리 호텔을 나가서, 음주가무를 즐기고 왔다. 젊은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서, 시간을 보내고 오기도 했다. 나는 그때 36살이기는 했지만, 젊은이들의 맏형 격이기도 하고, 학생과 사회인의 중간이기도 했고, 또 나는 참석자이기도 했지만 옹달샘 스태프는 아니었지만 명상센터와 인연을 맺고 있어서 옹달샘 준 패밀리 같은 소속이 있었다. 옹달샘 직원은 아니었지만, 한 달 이상 청년 자원봉사를 했기 때문에, 그냥 명상 프로그램 참석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온전한 정신이었다면, 충분히 동행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온전한 정신이 아니더라도, 내 돈만 잘 지켜서, 여행 중 자유시간에 무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참가비만 있었더라면, 잘 어울렸을 것이다. 동생들과 다녀도 내도 돈을 벌지 않는 입장에서 내가 쏠 필요도 없지만, 각자 뿜빠이해서 낼 때에는 남들 내는 만큼 낼 수 있는 정도이면 충분했다. 또 나는 나이가 어중간에서 아저씨 아줌마인 형님과 누님들과 같이 다닐 수도 있었는데, 그러면 사실 얻어먹어도 되는데, 최소한의 돈이 있어야 함께 다닐 마음의 여유가 있는 것이다.
16일 여행의 5일 차 거의 모든 돈을 다 써버려서, 나머지 여행을 하는데 너무 힘들었다. 물론, 기본적인 숙식 간식까지 다 냈기 때문에 여행하는 자체는 어려울 것은 없는데, 사람들과 어울리며 커피도 마시고, 어디 들어도 가고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충분한 돈을 가지고 가서, 하루에 돈을 다 써 버려서, 거지 같은 시간을 보냈다. 여행의 공식 일정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 공식일정이 대개 6시에 시작해서 10시에 끝나지만 말이다. 결정적으로 돈을 다 써 버려서 곤란했던 것은, 6시에 산책으로 시작해서 일정이 시작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음주가 절대 금지이지만, 10시에 일정이 끝나면 모범생들 빼고 다들 끼리끼리 모여서 시간을 보내고 들어오기 때문에, 그 재미난 무리들에 끼는 게 곤란했다. 물론, 나는 그 상당한 돈을 가지고, 나 혼자서 나름 재미난 시간을 보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특별한 여행이었는데, 나는 동네 마실 다니듯 다녔다. 그때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클라우드 관리를 잘못해서 클라우드에 사진을 남기고 스마트폰에서만 지우려다가, 전부 지워져 버렸다. 그래서 그때 남은 기록이 없다.
이 여행에서 나에게 남은 유일한 한 가지는 여행수첩이었다. 여행수첩을 펴 보면 여행 일정이 나와있다. 이를 토대로 나의 기억을 소환할 수 있다. 소환되지 않는 기억은, 그때 일정을 통하여 인터넷과 책 등을 통하여 자료를 조사하여 복원을 해야 한다.
가장 많은 기간 체류했고, 많은 기억과 사진과 기록이 남아 있는 여행지는 네팔이다. 아내를 만나고 약혼을 하기 위해 간 2주, 그리고 결혼식을 하고 아내 결혼비자와 대학원 논문 통과 수속을 기다리는 동안 5개월 넘는 기간, 네팔에서 보냈다.
언젠가는 여행기를 쓰기 위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시기가 올지 모르겠다. 언젠가는 그게 일이 되는 때가 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여행기는, 남아있는 기록을 토대로 기억을 소환하고 그 빈 곳을 상상력으로 메우는 것이다. 내가 찍은 사진이 없으면, 그때 기억과 기록에 관련된 사진을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상상력으로 복구를 하는 방법이 또 있다.
모든 작가가 여행을 가서 여행기를 쓰는 것은 아니다. 자기 집 골방에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면서 여행기를 쓰기도 한다. 원래 글은 가서 쓰는 게 아니라, 결국은 자기 골방에서 쓰는 것이다. 그 골방이란 게 상징적 의미로, 실제적으로는 카페의 한 자리가 될 수도 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