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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Oct 25. 2020

박사도 아닌 학사를 13년 반 만에

가장 늦게 가던 사람이 가장 앞에 서있기도 한다

가족들과 식사하러 갔던 전원의 식당에서 ⓒ 최다함


13년 반 만에

마침내 졸업했다


내가 병이 들었을 때 그 병을 치유하는 가장 첫걸음은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99학번으로 입학하여 13년 반 만에 2012년 8월 여름 드디어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군대에 가서 조울증에 걸리기 전, 1학년 때도 학교 공부와 학과 생활에 충실하지 않고 겉돌았지만,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선은 지켰다. 지금은 경쟁이 심해져 1학년 때부터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지만, 우리 때만 해도 남학생 중 상당수는 1학년 때는 놀면서 낭만을 즐겼고, 나도 그 정도 선이었다. 상사병과 군대에서의 부적응과 집단 괴롭힘으로 조울증에 걸린 나는 그 선을 과도하게 넘어버렸다. 13년 반 만에 겨우 그리고 마침내 졸업을 하였다.


사실 2009년 1학기 때 이미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있었다. 한 과목의 교양수업과, 한 과목의 봉사활동과, 한 과목의 교생실습만 다녀오면 되었다. 부모님께서는 드디어 큰아들이 마침내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교생실습을 간다고 실습 때 입을 정장을 양복점에서 사주셨다. 불행하게도 2009년에는 내 인생에서 가장 심각했던 조울증 증세를 보였던 한 해였다. 아찔했던 한 해였다. 깊은 산속 끝없는 계곡을 혼자서 하루 종일 걷다가, 돈을 다 쓰고 공원에서 노숙하다가, 길에서 객사할 뻔하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서 춘천에서 혼자 하숙을 하고 있었다.


2009년 3월에 학교 자퇴를 했다. 등록금을 빼서 그 돈을 쓰려고 자퇴를 했다. 빚을 지거나 도박을 하거나 주식 투자를 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 중에 하나가 과도한 돈을 쓰는 것이다. 일반적인 과소비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가진 모든 돈을 쓰기도 한다. 자기 돈이 아닌 끌어올 수 있는 모든 돈을 끌어와 쓰기도 한다. 나 또한 많은 돈을 쓰기는 했지만, 다른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새 발의 피이기도 하다. 가산탕진까지는 아니고, 빚을 진 것까지도 아니니까 말이다. 내 통장의 내 돈을 모두 쓰고, 자퇴하여 등록금 빼서 다 쓰고, 어머니께서 내 이름으로 들어 놓으신 아파트 청약을 깨서 쓰는 정도였다. 대형사고를 친 것을 축소 해석하고 합리화하려는 것은 아니고, 내가 벌은 내 돈을 다 쓰고, 등록금이나 아파트 청약의 부모님 돈이라고 해도 내 이름으로 넘어온 돈이고, 가산탕진까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조울증을 잘 관리하지 못해 더 심한 케이스들이 있다는 것이다. 조울증이 본인이나 가족에게 가장 힘든 정신질환이기도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쉬운 정신질환이기도 하다. 자기 증세에 맞는 약물농도를 찾은 후에 그에 맞는 약을 꾸준히 먹으면서 약물농도만 유지해 주면 관리가 되는 질환이다. 환자 본인이나 가족이 그 정도까지의 인식까지 이르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약을 며칠 안 먹어도 기분이 뜨고, 한두 달 안 먹으면 중증 상태에 이르러 사고를 치지만, 약 잘 먹으면 정상적인 정신이 유지되는 그 정도의 증세를 가지고 있다. 약을 안 먹으면 심각해지고, 먹으면 괜찮아진다. 약을 잘 먹어도 기분이 뜨기는 한다. 이 또한 약을 먹은 경우와 안 먹은 경우가 판이하게 다르다. 병원을 다니며 약을 계속 먹고 있는 경우에는, 약간의 약만 증량하면 바로 증세가 가라앉는다. 간혹 약을 먹어도 스트레스나 계절의 변화 등으로 인해서 입원에 이를 정도가 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약을 계속 먹고 있는 경우에는 증세도 심각하지 않고 입원 기간도 길지 않다.


2009년 3월에 자퇴를 했으나, 부모님께서 사태를 빨리 파악하셔서, 그해 8월에 재입학을 하고 휴학처리를 바로 했다. 우리 학교와 학과는 그다지 학사관리가 엄격하지 않아서, 학사경고나 ALL F 가 누적되거나 해도 매 학기 등록금 계속 내면서 졸업학점만 따면 언젠가는 졸업할 수 있었다. 13년 반이 걸렸지만 말이다. 자퇴를 해도 바로 가서 입학금 다시 내고 수업료 내면 재입학이 된다. 국립 대학교를 가서 학비는 반절이었지만, 남보다 훨씬 많은 학기를 다녔고, 오랫동안 집을 떠나 춘천에서 살았기 때문에, 부모님 돈을 많이 썼다. 남들 박사까지 하는 것 이상으로 돈과 시간을 썼다. 나 또한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병원 잘 다니면서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 잘 받았으면 괜찮았을 것이다. 내 병 조울증에 대해 나도 부모님도 잘 몰랐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은 정신과 약이 전혀 부작용이 없다고는 하지만, 환자들 입장에서 느끼는 부작용은 없지 않은 듯하다. 부작용을 호소해서 약을 안 먹는 것만은 아니다. 약 먹는 자체가 나를 정신병자라고 규정짓는 것 같고, 약 먹는 사람은 나약한 것 같고, 약이 나를 조종하는 것 같고, 조증 상태에서 기분 좋고 창의적인 생각이 제한되는 것 같고, 그런 병증 때문에 약을 먹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은 조울증 약에 부작용이 없다 말씀하시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호소할 수 있다. 실제 부작용이 있다 하더라도 조울증 증상으로 인생 망치는 것보다 작은 부작용들을 감수하는 게 낫다. 조울증이 시작된 지 20년이 된 사람으로서의 경험에서 나오는 깨달음이다. 작은 부작용들은 의사 선생님과 상의해서 약을 해당 부작용이 없는 다른 약으로 바꾸고, 운동 등의 자기 관리로 극복하면 된다.


2009년은 가장 위태로왔던 한 해였다. 인생의 촛불이 완전히 꺼질 수도 있었다. 자퇴하고 수업료 빼서 그 돈으로 며칠 동안 다 써 버리며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공원에서 노숙을 하고 대형마트 시식코너에서 허기를 해결하고, 모든 돈을 다 써버리고 경찰서에 가서 도움을 구하니 집에 가라고 마음씨 좋으신 경찰관 아저씨가 개인 돈인지 만원을 주셨다. 그 돈 가지고 그 근처 찜질방에 들어가서 쓰러졌다. 그 후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부모님이 오셔서 집으로 데려가셨다. 그 정도 상태이면 바로 병원에 가서 상담을 하고 입원을 시켜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정신질환에 대해서 잘 모른다. 지금 나도 조울증에 대해 환자로서 나 자신의 증세의 조울증을 아는 것뿐이다. 다른 일반 사람들보다도 체험적으로 조금 더 아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의를 찾아 도움을 받아야 한다. 조울증의 원인을 여러 가지로 추측할 뿐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고 완치방법은 없다. 매일 일정한 약을 먹어 약물농도를 유지하면 일반 사람과 동일한 수준의 기분조절을 할 수 있는 정도까지 의학적 발달이 되었다. 완치는 되지 않지만, 매일 약 먹으면 아무 문제없이 보통 사람처럼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조울증을 슬기롭게 조절하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다.


2009년은 위태로왔던 시기였지만, 돌아보면 은총이었던 날들이었다. 그 상태에서 길에서 객사하지 않았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만한 대형사고까지는 치지 않았다. 착하고 순수했던 영혼이 선을 한창 넘어 내 멋대로 살았지만,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피해를 입히는 상태까지 가지는 않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내 때문에 조울증에서 완전히 회복되어 다시 일어섰지만, 부모님의 사랑으로 인생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오랜 아픔과 방황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부모님의 사랑이 내 병을 고치지는 못했지만, 그 사랑 때문에 삶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할아버지 자손들 온 가족이 모인 날에 ⓒ 최다함


조울증의 정점에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아프고 아파서 어느 선을 넘으면, 착하고 순수한 영혼이 도덕성 제로가 되기도 한다.
가해자가 처음부터 가해자였던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어느 선을 넘으면 가해자가 된다.


2009년에서 2010년을 넘어가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10대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20대 때는 선데이 크리스천이었지만 여전히 교회 곁을 맴돌았다. 2009년에서 2010년을 넘어가며 서른 즈음이 되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교회와 교인에 실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해서, 무신론자가 된 것은 전혀 아니다. 그저 세상에 하나님이란 초월적 신의 존재가 없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신을 부정했다기 보다도, 신의 중계자를 자처했던 선지자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을 뿐이다. 초월적 존재 신이 무능하고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팔아먹는 자칭 선지자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점에 진화 과학자이자 전투적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란 책을 사서 읽었다. 일독을 하지는 않았고 눈 가는 부분만 읽고 덮었다. 도킨스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고, 도킨스의 논리의 허점을 느꼈지만, 도킨스를 극복하여 훗날에 대한민국의 리처드 도킨스가 되고 싶었다. 리처드 도킨스처럼 전투적 무신론자가 되겠다는 의미도 아니고, 종교를 부정적으로 보겠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종교가 믿고 싶은 사람은 믿고, 종교를 믿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종교로부터 자신의 가치에 태클받지 않은 정도를 바랐던 것이다. 부모가 교인이면 어려서 본인이 깨닫기 전까지는 부모님이 자녀의 믿음을 결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본인이 더 이상 종교를 가지지 않겠다고 결단을 내리면 종교가 태클을 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정도의 종교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꿈꾸었다. 종교의 박멸이 아닌,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나 자신의 불신앙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꿈꾸었다. 그 시점에 사후에 절대로 천국은 존재하지 않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내세보다 현실을 즐기며 사는 게 좋다고 믿었지만, 사후에 대한 믿음이 본인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다 말할 수도 없고 본인의 자유라고 생각을 했다. 신앙의 자유로 인해 불신앙의 자유가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신앙의 자유는, 믿을 자유뿐 아니라 믿지 않을 자유도 포함한다고 생각했었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생각이었지만,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목사님 아들로서,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나도 부모님도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어려움이 있었다. 뿐더러 조울증으로 아파서 부모님과 가족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도움을 받아서 살면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게 어떤 측면에서 배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과 가족 외에는 타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고까지는 치지 않았다. 물론 조울증 이후에 아주 잠깐씩 순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겠지만, 법적 테두리를 넘어가거나 그런 일은 아니었다. 조울증 이전에는 항상 예의 바르고 착한 사람이었지만, 조울증 이후에는 나 자신을 조절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지금 와서 일일이 기억하고 사과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부모님과 아내의 사랑으로 조울증을 극복하며 살고 있는 나는, 성공한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조울증으로 아플 때, 나로 인해 작은 상처를 받았던 사람이 있었더라면, 예전에 나와 인연이 있었다는 자체를 자랑할 수 있을 만한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타인에게 큰 피해를 주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착한 남자는 아니었다. 항상까지는 아니었지만 순간 나쁜 남자였을 때도 있었다. 걸리지 않는 범위에서 법을 넘기도 했었던 것 같다. 십계명에 십일 계명이 있다고 한다. 십일 계명은 '걸리지 마라'라고 한다. 법이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을 존재하는 것이지, 걸리지 않으면 넘어가는 것이다. 강력범죄가 아닌 이상,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하고 고발하지 않는 이상, 넘어가는 게 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부모님 외에는 다른 이에게 큰 해를 끼치는 않았지만, 내 안에 가지고 살며 지키고 살았던 선을 완전히 넘어선 삶을 살았다. 더 이상 선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조울증으로 인해 선을 넘은 나는, 선을 넘은 사람들과 친구 하며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갔다. 선을 넘은 사람들의 선을 넘은 사랑과 우정이 진정성이 없다고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선을 넘은 세계에서 오늘의 친구는 단지 오늘 하룻밤의 친구이지, 대부분 내일의 친구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아내 에미마 옆에서 ⓒ 최다함


어머니 카페에서

일하며 요양하며

다시 회복되다


어제 가장 앞서간 사람이 오늘 가장 앞서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 가장 느리게 가고 있는 사람이 내일 가장 빠르게 가기도 한다.
느리게 가라는 결론이 아니라 조바심 내지 말고 자신의 스피드대로 가면 된다.


집에서 지내다가 어머니께서 운영하시던 카페에서 일했다. 어머니께서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20년 정도 근무하시다가 명예퇴직을 하셨다. 명예퇴직하시고 퇴직금을 일부는 연금으로 받으시고, 일부는 돈으로 받으셔서 수원에 공간을 사서 운영하셨다. 카페를 하려고 카페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다목적의 이유가 있었다. 20대 때 조울증으로 방황을 했다면, 동생이 10대 때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방황을 했다. 그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동생을 나쁜 친구들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동생은 고등학교 1학년 입학하자마자 학교를 그만두었다. 부모님께서는 그 친구들로부터 동생을 떼어 놓으려고, 안양 평촌의 아파트를 팔고 지금의 수원 아파트를 사서 이사하셨다. 수원 아파트 근처에 상가를 사서 카페를 운영하셨다. 어머니께서 기독교 카페를 운영하고 싶으셨던 이유도 있고, 그 안에서 동생의 방황을 끝내주기 위한 일들도 하시려고 했던 것 같다. 또한 아버지께서 그즈음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으로 근무하시며, 퇴근하신 후에 야간 신학대학원에 다니셔서 목회를 시작하셨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전도사님이셨을 텐데, 다른 두 분의 전도사님과 아버지를 포함하여 총 세 분이서 공동으로 우리 카페에서 개척교회 공동 목회를 시작하셨다. 시간이 지난 후에 각기 다른 길로 헤어지셨다.


동생 방황을 끝내 주고자, 아버지 개척교회를 하시고자, 더불어 어머니께서 은퇴하신 후에 낭만적인 기독교 문화공간 카페를 만들고자, 다목적으로 시작한 카페에서, 조울증으로 방황하여 집에서 요양을 할 때 일을 하였다. 카페에 손님이 다 떨어져 나가고 없을 때였다. 어머니께서도 카페를 지키며 운영을 하실 의지가 떨어지셨을 때였다. 적자가 나도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던 것이, 전세나 월세가 아니라 우리 건물이었고,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돈을 버시면서 교회에서 보수를 받으시지 않으시고 카페를 주일에는 예배당과 교육관으로 쓰셨고, 아픈 내가 손님 오시면 커피 타고 손님 없을 때는 음악 들으면서 쉬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마이너스가 나도 큰 상관은 없었다. 마이너스 나도 좋다는 마음으로 카페를 운영했던 것은 아니셨고, 손님이 많이 오고 수익이 나서 제가 졸업을 못할 경우 그 카페가 제 미래의 터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다. 어차피 세 얻어서 하는 카페가 아니라 우리 소유의 카페였고, 다목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카페에서 마이너스가 나도 아픈 아들 쉬는 공간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부모님께서는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다. 적절한 시기에 그 카페를 팔아서 그동안 손해 보았던 것을 청산했다.


카페에서 쉬면서 소일하면서 회복해서 에너지를 얻어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얼마 남지 않은 학점을 따고 영어교육과 학부생활을 마무리 지을 수가 있었다. 대학교 졸업식에는 참석하지도 않고 학과 사무실에서 졸업장만 타가기도 하는데, 13년 반 만에 마침내 졸업을 하니까 가족이 전부 총출동해서 축하해 주시고 사진을 찍으며 파티를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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