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춘천교대 뒤에 있는 교회로 교회를 옮겼다. 교대 정문에서 큰길 쪽 큰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찾아간 교회가 가장 많은 교대생이 다니는 교회는 아니었지만, 설립 목사님이 교대생 사역을 위에 세우신 교회라, 교대생 중심의 교회였다. 교대 다니는 자매님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 교회를 옮겼다. 청년부 예배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기소개를 했다. 예배와 모임이 끝나고 자매님 한 분이 다가왔다.
"최다함, 이름이 참 좋네요. 무슨 뜻이에요? “
내 이름 최다함의 세 가지 뜻이, 최선을 다하라, 다윗과 아브라함, 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교회로 옮긴 지 얼마 안 된 형제였고, 그녀는 신앙 자체를 가진 지 얼마 안 된 자매였다. 첫사랑으로 조울증에 걸려 인생 너덜너덜해졌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두 번째 사랑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첫사랑의 코드명이 '소녀'였다면, 두 번째 사랑의 코드명은 '아리따운꽃'이었다. 아리따운꽃은 두메산골 7남매의 여섯째였다. 아리따운꽃은 초등학교 때 다음 날이 시험인데 시험공부 대신 울면서 소의 꼴을 먹여야 했던 우리 세대에는 보기 드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아리따운꽃의 그런 정서가 나에게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작은 엽서에 내가 지은 시를 적었다. 그리고 '우리 친구 같은 교회 오빠 동생 하자'고 했다. 아리따운꽃도 '교회 오빠 동생 하자'고 답했다. 나의 방점은 '오빠 동생'이었고, 아리따운꽃의 방점은 '교회'였지 싶다.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아리따운꽃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라고 거절했다. 나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는 남자가 되면 되지 생각했다. 그게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내가 서두르지 않았고, 천천히 친한 사이가 되었었더라면, 썸 타는 사이로 진전되었을까? 한때는 그랬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될 인연이었더라면, 어떻게라도 되었을 것이다.
아리따운꽃은 서태지 매니아였다. 몇 년 전 암으로 돌아가신 나의 큰 이모부의 절친의 아들이 서태지였다. 이모부 아들인 사촌 형 결혼식에 서태지 아버지가 오실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이모부가 서태지 아버지랑 절친이라 해서, 나랑 서태지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모부에게 부탁하면, 콘서트 초대권이나 앨범 CD를 얻을 수 있는 정도였다. 아리따운꽃이 서태지를 좋아한다니, 아리따운꽃과 서태지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아리따운꽃의 고향 집이 두메산골 오지인데, 그 마을을 '아리따운꽃 더불어숲'이라는 생태공원으로 잘 사는 시골마을로 만들고 싶었다. 정상적 사고 범위를 넘어 조증의 과대망상의 일종이었다.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2006년 1 2 학기에는 0.0에 가까운 학점을 받았고, 다시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휴학을 하고 수원 집으로 돌아갔다. 조울증에 걸리기 전에는 짝사랑으로 내 마음이 힘들어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작동이 되었는데, 조울증에 걸려 내 머릿속 필라멘트가 끊어진 이후에는, 자주는 아니었지만 때에 따라 집착을 하게 되고 상대방을 불편하게 했지 싶다.
지금에 와서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할 필요도 없고, 해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거절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원하지 않는데 왜 나를 사랑하나 하겠지만, 어떤 사랑의 경우 사랑이 내 마음대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사랑은 하지 않는 게 정답이라도, 그게 항상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사랑은 심각한 중증 정신질환이다.
소녀를 향한 첫사랑이 시작되고 끝나기까지는 7년이 걸렸고, 아리따운꽃을 향한 두 번째 사랑은 유통기한이 3년이었다. 나 혼자만의 짝사랑이었지 사귄 것도 썸 탄 것도 아닌지라, 그 사이 주변을 스치고 간 다른 여자들에게 아무 설렘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두 번째 감정의 상대가 아리따운꽃이었다는 것이지, 나도 남자인지라 수많은 여자들에게 설렘과 매력을 느끼곤 했는데, 이는 아마도 남성 호르몬 탓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