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월 생인 나는 '빠른 80년 생'이다. 7살에 학교에 들어가, 초중고 때는 '79년 생'과 친구였다. 1년 재수를 하고 '99학번'이 된 나는, 대학 이후부터 '80년 생'과 친구가 되었다. 현재 국내 최고의 영화번역가가 된 황석희가 강원대 영어교육과 '99학번' 친구인데, '79년 생'이라 '석희 형' '석희 오빠'라고 부르는 과 동기 친구도 있었다. '79년 생'과 초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지만, '80년 생'과 대학교를 함께 시작한 나에겐,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야자'였다. 1999년 봄에 입학하여 2012년 여름이 되어서야, 13년 반 만에 강원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빛나는 청년의 때를 잃어버리고 돌고 돌고 돌아서 겨우 여기까지 온 것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2000년 스물한 살 조울증에 걸려 정신줄을 놓고 살다가 마침내 졸업을 하게 되었으니, 박사도 아닌 학부를 13년 반 만에 마친 것에 대해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2009년 봄 이미 마지막 졸업 학기를 맞이하였다. 교양과목으로 사회봉사 한 과목을 듣고, 교생실습만 다녀오면 끝이었다. 어머니께서는 큰아들이 마침내 대학 졸업을 하고 교생실습을 간다고 정장을 사주셨다. 불행하게도 2009년은 내 인생 가운데 조울증이 가장 심각했던 한 해였다. 인적 없는 깊은 산속 끝없는 계곡을 혼자서 하루 종일 걸었고,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쓰고, 대형마트 시식코너에서 허기를 채우고, 거리에서 풍찬노숙을 했다. 몇 차례 길에서 객사할 수 있었던 아찔했던 한 해였다. 그런 상태에서 집에서 가족들의 돌봄 가운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객지에서 혼자 하숙을 하고 있었다.
2009년 3월 학교를 자퇴하고, 등록금을 빼서 그 돈을 다 썼다. 과대망상과 함께 조울증의 주요 증상 중 하나가 과도하게 돈을 쓰는 것이다. 사치를 넘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쓰고, 한 발 더 나아가 가산을 탕진하기도 한다. 자기 돈을 다 쓰면 어디서 귀신 같이 돈을 끌어와 쓰기도 한다. 나도 많은 돈을 썼지만, 조증 상태에서 차후에 수습할 수 없는 돈을 쓰기도 한다고 들었다. 내 증세가 약했다기보다 그만큼 쓸 돈 자체가 없었다. 가산탕진은 아니었지만, 내 돈 전부를 뿌리고 다녔다. 빚을 지지는 않았다. 빚을 얻을 담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증이 와서 기분이 떠서 모든 돈을 다 쓰고, 계속하여 쓸 돈이 필요해서 사채라도 쓰고 싶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빌려준다는 고리의 사채도 어떤 형태로든 담보와 신용이 있어야 빌려주는 담보대출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대출은 담보대출이다. 담보 없이 대출해 주는 대출은 어디에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개털이었던 나는, 사채라도 끌어 쓸 담보와 신용 자체가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저 내 통장 잔고 안에서, 내 돈을 물 쓰듯 탕진하는 수준에서 멈추었다.
약을 끊으면 처음 얼마 간은 평소보다 더 좋아 보이기도 한다.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최악의 상황으로 가는 과정이다. 약을 먹지 않은 채 방치해 두면, 기분이 떠서 심각한 조증 상태가 되어 주변에 민폐를 끼치고 물의를 일으키고,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을 당할 수밖에 없는 파국을 맞이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약을 먹으면 아무 탈 없이 기분이 조절되고, 약을 먹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조울증이 재발하여 심란해진다. 약을 먹는다 하여 재발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나 계절의 변화로 재발이 되기도 하지만, 입원 없이 외래에서 약을 증량함으로 조절이 가능하고, 설사 입원을 하게 된다 하여도 증세가 심각하지 않아 입원기간이 짧다. 병원 꾸준히 다니며 약을 잘 먹고 있어 이제는 어느 정도 조절이 되기도 하지만, 아내 에미마와 결혼한 후에는 아내가 곁에서 관리를 잘해주어서 결혼 후 더 이상의 재발은 없었다.
2009년 3월에 자퇴를 했지만, 부모님께서 사태를 아시고 수습하셔서, 그해 8월 바로 재입학을 하고 휴학을 했다. 보통의 학생들보다 많은 학기를 다니며 많은 등록금을 냈고, 자퇴하고 재입학하여 입학금도 한 번 더 냈다. 국립대라서 학비는 절반이었지만, 오랜 기간 많은 학기를 다녔고, 객지인 춘천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부모님께서 많은 돈을 쓰셨다. 남들 박사 하는 돈과 시간을 나는 강원대 영어교육과 학부를 졸업하는 데 썼다.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다. 꾸준히 병원에 다니며 약을 끊지 않고 먹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는 정신과 약이 부작용이 없다고 하지만, 환자가 호소하는 부작용은 있다. 실제 부작용이 있다 하더라도, 조울증 증상으로 겪어야 하는 인생 참사보다, 작은 부작용을 감수하는 게 낫다. 2000년 봄 21살 때 조울증이 시작되어, 이제는 조절하고 관리하여 조울증을 극복한 사람으로서 깨달음이다. 물론 상태가 좋을 때가 아니라, 상태가 안 좋아 조울증이 최악에 상태에 있을 때 주로 조울증의 부작용을 호소한다. 조울증 환자가 약을 끊는 것은, 꼭 부작용 때문만은 아니다. 약 먹는 자체가 나를 정신병자로 규정하고, 약에 의지하는 것이 나약해 보이고, 약이 나를 조종하는 것 같고, 창의적인 생각과 활동이 제한되는 것 같아서 약을 먹지 않기도 한다. 자신이 조울증 환자인 것을 아직 인정하지 못하거나 부분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주치의 상담 없이 약을 안 먹어 비극이 시작된다. 모든 치료는 내가 아픈 것을 아는데서 시작한다. 정신적으로 아픈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치료 조절 관리가 필요한 것뿐이다.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으며 아내 에미마를 만나 사랑으로 행복해지고 아내가 나를 잘 관리해 주면서 나는 조울증을 극복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약을 완전히 끊고 완치가 되는 그런 극복은 없다. 병원에 꾸준히 다니며 처방받은 약 몇 알을 매일 비타민처럼 먹으면서 자신의 삶을 관리하면서 별 일 없이 사는 것이 조울증 극복이다. 조울증 극복은 완치가 아니라 조절이다.
2009년에서 2010년을 넘어가면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10대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20대 때는 선데이 크리스천이었지만 여전히 교회 곁을 맴돌았었는데. 2009년에서 2010년을 넘어가며 삼십 대가 되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하나님이 미워서 무신론자가 된 것이 아니고, 그저 세상에 하나님이란 초월적 신의 존재가 없기에 세상과 내가 요지경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더 이상 신을 믿지 못했다기보다,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선지자가 나와 별 다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었다.
집에서 지내며 어머니께서 운영하시던 카페에서 일했다. 어머니께서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20년 근무하시다가 명예퇴직하시고, 수원에 상가 공간을 사서 카페를 운영하셨다. 돈 벌려고 시작하셨기보다, 여러 가지 다목적의 이유가 있으셨다. 우리 예사랑교회가 개척교회로 시작했을 때 첫 예배 장소였고, 내가 조울증으로 방황할 때 쉬어 갔던 공간이기도 했다. 어머니께서는 초등학교 교사 퇴직 후 문화공간으로 크리스천 카페를 하고 싶으셨던 로망이 있으셨던 것 같다.
카페 자체로는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한 만년 적자였지만, 카페 공간이 우리 가족과 이웃이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쉬어가는 쉼터 역할을 했다. 세 얻어서 한 게 아니라 우리 소유의 카페였기에, 아픈 가족과 이웃이 쉬어가는 다목적 공간이었고, 어머니 아버지 친구 지인이 찾아오던 아지트였기에, 부모님께서는 손해 봤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다. 적절한 시기에 팔아서 청산하고 털어버렸다. 카페 해서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경제적으로는 마이너스였지만, 그때 우리에게 의미 있었던 공간이기 때문에, 부모님께서는 손해를 보았다 생각하시지는 않는다.
2009년 나의 조울증 인생의 최대 위기를 보낸 후, 손님 거의 없는 카페를 어머니와 운영하면서 다시 회복이 되었고, 학교로 돌아가 남아 있던 교생실습 한 과목을 이수했다. 13년 반 만에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