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봄이었다. 한 학년에 한 반인 작은 학교에서 영어회화전문강사로 첫 직장을 시작했다. 말이 영어회화전문강사이지 하는 일은 비정규직 영어교사였다.
한 주에 18시간 이상 수업을 했다. 수업만 18시간이라는 것이지, 일반 교사와 근무 시간은 같았고, 그 외 시간에는 수업 준비를 하고 학교 업무를 보았다. 3학년부터 6학년까지 정규 수업 시간을 다 들어가도 의무 수업 시수를 채울 수 없어서, 방과 후 수업도 들어갔고, 1 2학년 창의체험 활동 시간에도 들어갔고, 심지어 유치원 영어놀이까지 들어갔다. 일반적인 규모의 학교에서는 한 학년 또는 많아야 두 학년을 맡아, 레슨 플랜 하나 써서 여러 반 돌려 쓰는데, 그 학교에서는 매 수업마다 새로운 레슨 플랜을 짰다.
나 혼자 수업을 했던 것은 아니다. 원어민 선생님이 있어서 팀티칭을 했다. 원어민 선생님이라고 하나, 중학교 때 캐나다로 이민 가서 국적이 캐나다이지, 한국어도 정서도 완전 한국인인 검은 머리 외국인이었다.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기타를 치며 영어 노래를 부르며 영어 공부한다기보다 영어로 아이들과 놀았다. 원래 초등학교 영어교육의 목적이 영어로 놀면서 영어와 친해지는 것이기도 하고, 교과서 진도를 빼면서 영어로 놀았으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다음 해 재계약을 하기로 교장 선생님과 구두로 확정이 된 상태였는데, 도교육청의 정책 변화가 있어 영어 정규 수업 시수가 18시간이 되지 않는 소규모 학교에는 더 이상 영어회화전문강사를 배치하지 않겠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그 공문을 처리하는 실무자가 나라서 나를 계약 연장하지 않겠다는 공문을 내가 처리하여 결제를 올려야 했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다른 학교에 서류를 내고 면접을 보고 합격하여 같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원자가 나 하나뿐이었고, 채용 날짜가 새 학기 시작을 앞에 두고 있어서, 학교로서도 나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옮겨간 학교에서도 나는 교과서 진도를 나가고, 영어로 노래하고 게임하며 놀았다. 전 학교보다 새 학교가 소위 좋은 학구라 학생들 평균 영어 실력이 좋았고, 팀티칭을 하는 베테랑 원어민 교사도 없었지만, 그냥 그런대로 직장생활은 원만했다. 영어실 책상에 잘 지워지지 않는 볼펜으로 '최다함 개새끼'를 적어놓고 나가는 초딩 하나가 있었고, 학부모 공개수업 때 민원이 들어와 교감 선생님께 불려 가 지도를 받은 적이 한 번 있었을 뿐이었다.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1학년 여선생이 예뻤다. 모델을 해야 할 사람이 선생님을 하고 있었다. 1학년 여선생의 교실은 1층 저쪽에 있었고, 내가 있었던 영어실은 학교 맨꼭대기 5층 이쪽에 있었다. 동선 자체가 우연히 마주치기에 거의 불가능했다.
그해 6월이었다. 1박 2일로 교직원 워크숍을 갔는데, 횡성 가서 마블링이 예술인 한우를 먹고, 강릉 가서 회 먹고, 양양 가서 바다 보고, 돌아오는 직원여행이었다. 영어회화전문강사로서 비정규직 영어교사였지만 남자 선생님이 거의 없는 사정으로 내가 친목회 총무를 맡아 직원여행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1학년 여선생이 예뻤던 것은 3월 초 새 학기부터였다. 학기 초부터 직원여행 날짜는 정해져 있었다. 천천히 친해져 직원여행 때 고백하려는 계획이었다. 문제는 우리는 시간이 지나도 친해질 수 없는 동선에 각각 떨어져 있었고, 직원여행 때 둘이 가까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있을 리가 없었고, 3개월 동안 1학년 여선생을 향한 마음의 무게로 나는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1학년 여선생은 내 마음을 알고 있었고, 나의 마음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되었다, 고백 한 번 해보지 않고 마음을 접었다. 용기가 없었다기보다 안 되는 사랑은 어떻게 해도 안 된다는 것을 경험 상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인생에 나를 슬프게 하는 한 가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생각이야 수도 없이 많이 했지만, 극단적인 행동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학년 여선생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세상은 더 이상 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0대 20대 때는 그러했지만, 30대가 된 나는 하나의 운명이 지나가면, 결단코 자주는 아니지만, 다른 운명이 찾아온다는 것을 경험 상 알고 있었다. 운명이 나를 스쳐 가는 것과 그 운명을 잡을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음 날 수업이 많았고, 수업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고, 책상에는 업무가 쌓여 있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내게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도 그 상태가 우울증이었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할 것을 내가 아는데, 내 안에 손가락 까딱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식칼로 손목을 그었다. 날이 무뎠는지 내가 모질지 못했는지 피도 나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조울증 약을 전부 털어 먹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게 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겠다 싶었다. 섬유유연제 피존을 마셨는데 이것이야 말로 극강의 지옥의 맛이었다.
다음 날 아무 연락 없이 출근을 안 하니, 집으로 연락이 갔고, 어머니께서 내 원룸으로 찾아오셨다. 어머니께 이끌려 응급실에 갔다. 나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피존은 괜찮았다. 샴푸 치약 비누 피존 등 그런 것들은 법으로 먹어도 죽지 않게 만들도록 되어있다고 들었다. 문제는 조울증 약의 농도였다. 조울증 약을 털어 먹을 때는 아무 고통도 없었는데 위험할 수 있어 위세척을 했다. 내가 세상에서 경험한 가장 큰 고통 중 하나였고, 다시는 이 짓거리하지 말자고 반성을 했다.
퇴원은 바로 했는데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주 남은 날 병가 내고 그다음 주 출근해서 눈썹 휘날리며 한 학기 마무리 짓고 여름방학에 들어가면 되었다. 그때 나는 그게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