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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Oct 28. 2020

첫 직장

초등학교에서 영어회화 전문강사로 1년 반 근무하였다

논산 시골집 앞 태풍으로 벼가 넘어간 논 앞에서 ⓒ 최다함


초등학교 영어교사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다


상사병과 조울증으로 오랜 기간 방황 후에
드디어 졸업을 하고 첫 직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2013년 수원의 작은 초등학교를 첫 직장으로 영어회화 전문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1년 동안 근무했던 첫 학교는 수원의 구도심으로서 아주 예전에는 잘 나가던 화려했던 학교였다. 학생 수도 많았고, 수원의 부유층들과 권력자들이 다니던 학교였고, 학부모님들이 선생님들께 촌지를 많이 주던 학교였다. 승진보다 촌지에 관심 있던 교사들이 가고 싶어 했던 학교였다는 풍문도 있다. 선생님들이 아직도 학부모들에게 봉투를 요구한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도 있는 것 같지만, 선생님들이 촌지를 받지 않은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이다. 지금도 받으시는 분들이 소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정도의 부조리는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나 있는 것이다. 지금은 받는 사람도 없고 주는 사람도 없다. 김영란 법으로 선생님께 음료수 한 잔도 드려도 큰 일 나는 사회가 되었다. 


그 학교에 지원을 했는데 나를 포함하여 두 명이 1차 서류 전형을 통과하여, 2차 수업실연 및 면접을 보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두 명만 그 학교에 지원했는지, 여러 명이 지원했는데 두 명으로 압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보통 1차에서 두 명을 압축해서 2차 면접을 본다. 2차 면접에 지원한 다른 여자분 한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은 토익 점수가 900점을 넘었다고 한다. 이 분이 면접 보러 왔다면, 아마도 나는 떨어졌을 것이다. 토익이 그 정도 되는 선생님이면 아마도 토익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수업 설계와 티칭도 잘하고 경력도 빠방 할 가능성이 크다. 그 여자분은 이 학교에 지원을 하시기는 했는데, 시험 못 보러 오겠다고 그날 아침에 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혼자 시험을 봐서 붙었다. 이 학교에서는 실력보다는 인성이 좋은 선생님을 원하기는 했다. 이전에 근무하시던 선생님께서 외국에서 유학도 하시고 영어는 잘하시는데, 인성에 결격이 많아서 학생들도 동료 선생님들도 모두가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러한 이유로 재계약을 하지 않게 되어 새로 영어회화 전문강사를 뽑게 되었다. 그 학교에는 원어민 교사가 한 분 계셨었는데, 중학교 때 캐나다로 이민 간 교포여서, 원어민 교사라고 하지만 사실 한국인이었다. 말썽쟁이 아이들도 엄하게 잘 휘어잡고 한국인 선생님이 없어도 혼자 수업이 가능한 분이셨다. 원어민 교사가 한국어 교사가 하는 몫까지 커버를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학력 수준이 낮은 학교라서, 아이들이 영어 공부를 많이 시키기보다, 영어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필요한 학교였는지 모른다. 는 영어 실력과 경력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기타 치면서 노래로 영어를 재미있게 가르치는 콘셉트로 잡았다.


원어민 교사와 함께 한국어 교사가 함께 하는 영어수업 팀티칭은, 한국인 교사가 주도하고 원어민 교사가 함께 참여하고 보조하는 형태가 맞다. 원어민 교사에게 더 많은 말 할 기회를 주어, 학생들에게 원어민 발음과 영어권 문화를 익히게 하는 것은 좋으나, 한국인 교사가 주도적으로 수업을 설계하고 원어민 교사를 관리하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원어민 선생님은 실력도 좋으시고, 경력도 상당히 있으시고, 한국어도 잘하시고, 그 학교에서 오래 계셨던 분이고, 학생들을 무서운 카리스마로 확 잡고 계셨던 분이셨기 때문에, 그분이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있었다. 모든 수업을 나와 원어민 선생님과 함께 공동으로 진행하는 것이 맞는데, 딱 반으로 쪼개서 반은 제가 하고 반은 원어민 선생님이 했다. 예를 들면, 한 달 동안은 제가 3학년과 5학년을 하면, 원어민 선생님께서 4학년과 6학년을 하고, 그다음 달엔 바꾸어서 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이유도 있기는 했다. 보통 규모의 학교에서는 한 학년을 맡거나, 많아도 두 학년을 넘기지 않는다. 수업 시수는 비슷해도 보통의 학교에서는 레슨 플랜 하나를 써서 여러 반을 돌려 쓰기 때문에, 수업 준비하는 시간이 많이 들지는 않는다. 내가 처음 근무했던 학교는, 한 학년에 한 학급씩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의 수업 안을 만들어 여러 반 돌려쓸 수가 없었고, 매 수업마다 새로운 하나 씩의 수업안을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다 3 4 5 6 정규수업으로만 교사 수업시수 규정을 채우지 못해, 1 2 학년 창의적 체험 활동 수업과 전 학년 방과 후 수업까지 했다. 심지어 유치원 영어놀이까지 해야 했다. 모든 수업을 1/2로 정확하게 반으로 짝 찢어서 나누어했다. 원어민 선생님은 성실하게 수업을 준비하셨기도 했지만, 이미 수년 동안 같은 학교에서 수업을 하셨기 때문에, 레슨 플랜을 노트로 가지고 계셔서, 큰 노력을 들이지 않으시고 수업을 하실 수 있었다. 한국인이지만 캐나다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그런지 몰라도, 신규교사에 대한 배려와 도움도 없다. 버벅대고 있으면 그동안 자기가 써 놓은 레슨플랜 노트 한 번 빌려 주셨으면 될 텐데 말이다. 마음이 인색하고 이기적인 분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나를 동생처럼 생각해서 누나 같은 마음으로서 신규교사를 독하게 트레이닝시키려는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내가 어디서 자료 가져와서 수업을 하면, 그것을 날름 가져가서 드셨다. 성격이 원래 그래서 나도 좀 자료 좀 공유해달라 그런 말도 못 했다. 사람은 선하신 분이었고 교사로서 많이 부족했던 나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셨는데, 신규 때 열심히 굴러서 한 번 성장해 봐라 하고 혹독하게 트레이닝을 시키자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내가 원어민 교사의 관리자인데, 원어민 선생님이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계셨다. 그럼 나는 항상 그분에게 신사적으로 대했느냐 또 그렇지도 않았다. 저도 정치를 했고, 그분을 견제했다. 교장 선생님과 원어민 교사에 대해서 단독 대면하여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원어민 선생님이 실력도 있으시고 잘 가르치시는데,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화를 내고 무섭게 해서 아이들이 영어수업을 좋아하지 않고, 한국어 교사인 나와 합을 잘 맞추지 않고 단독적으로 하시는 부분이 있어, 원어민 교사를 관리하는데 애로사항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그다음 해에 그분을 학교에서 내보내는 것을 검토해 보시라는 이야기였다. 내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서, 한 직장에서 보스에게 혼자 들으시라고 한 이야기가, 절대 그분에 귀에서 머물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께 드린 말씀이 원어민 선생님께 바로 전달이 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원어민 선생님께 최 선생이랑 잘해보라는 논조로 말씀하신 것 같은데, 원어민 선생님은 그동안 자기가 저를 좋게 대했는데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고 화가 났다. 나중에 잘 화해를 했지만, 그 사건을 무마하는데 애 많이 먹었다. 내가 그분을 컨트롤할 수도 없었고, 컨트롤하려고 할 필요도 없었다. 자기 몫은 잘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 하시게 그냥 놓아두고, 나는 내일이나 잘하면 될 일이었다.




논산 시골동네에서 네 가족이 저녁 산책을 하며 ⓒ 최다함


영어로 아이들과 재미나게 놀았지만

공부를 열심히 시키는 좋은 교사는 아니었다


영어회화 전문강사로 초등학교에서 일하던 짧은 시간 동안
어떤 면에서 나는 좋은 교사였지만, 어떤 면에는 나쁜 교사였다.
아이들과 영어를 매개로 즐겁게 놀면서도, 영어공부를 열심히 시켰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한 영어교사가 1주일에 기본 수업시수로 18시간에서 21시간 사이 수업을 해야 하는데, 나는 거의 21시간을 했다. 반 딱 찢어가지고 가 반 원어민 선생님이 반을 한다고 해도, 원어민 선생님이 하시는 수업에 가 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 활동 잘하나 봐 주고, 딴짓 안 하나 관리하고, 같이 팀티칭을 했다.


일 년 내내 매 수업 시간에 레슨 플랜 한 장 쓰고 한 번 수업하고 버렸지만, 제가 1년 동안 영어교사로서의 능력은 전혀 성장하지 않는 것 같았다. 원어민 교사와 수업을 같이 하면서도, 그 선생님의 교수법을 전혀 배우지 못했던 것다. 수업뿐 아니라 학교의 모든 영어교과 행정을 맡아해야 했고, 레슨 플랜을 만들고 PPT를 만들고 학습지를 만들고 수업 준비를 해야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수업 내용을 대본처럼 짜서 그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다. 가능하면 안 보고 말이다. 대본은 있지만 보지 않고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말이다. 그 정도의 수업 안을 만들 시간적 심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A4 한 장에 대략적인 개요만 짜서, 즉흥적으로 수업을 했다. Intro와 Small Talk는 무엇으로 시작하고, 오늘 배울 수업의 주제는 어떻게 제시하고, 오늘 분량의 교과서를 어떻게 수업 진행을 하고, 오늘 수업을 가지고 어떤 활동과 게임을 하고, 어떻게 연습하고 평가할지, 마무리는 어떻게 하고 인사는 어떻게 하고 끝낼지, 대략의 개요 제목만 적어 놓고 즉흥적으로 수업을 했다. 실력과 경력이 쌓인 베테랑 교사라면 그렇게 수업하는 것이 때에 따라서 효과적일 수도 있는데, 초보 교사로서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고 시간적 심적 여유도 없고 대안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지만 영어를 가르치는 수업 능력으로는 나쁜 교사였다. 잘 한 부분도 있었는데, 원어민 선생님이 잘 가르치시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무서워 아이들 심리를 위축시키기도 했는 반면에, 는 말랑말랑해서 단 한 번도 아이들에게 화내지 않고 가능한 재미있게 수업하려고 노력다. 교육과정 상으로는 초등학교에서는 그렇게 수업해도 괜찮은 데, 경쟁사회이고 학원 다니면서 공부를 많이 하기 때문에, 영어 놀이와 공부를 같이 열심히 시키는 게 좋은 교사일지도 모른다.


1년 내내 퇴근하고 나서도 완전히 준비해 놓지 못한 내일 수업 준비 때문에 고민을 않고 살았지만, 그렇다고 학교에 남아서나 집에 가서 수업 안을 다 짜 놓고 잠에 들지는 않았다. 신규교사에게는 수업 자체보다 수업 준비가 훨씬 중요하다. 수업 준비 잘하고 수업지도안을 드라마 대본처럼 잘 써서 그대로 읽기만 해도 좋은 수업이다. 또 그 정도로 한 시간 분량 스크립트를 미리 써 놓으면, 보고 읽지 않아도 초등학교 영어수업 정도면 충분히 잘할 수 있다. 영어나 교수법의 실력이 없었기 보다도, 지나치게 위축되고 쫄아 있었다. 신규교사여서 베테랑처럼 못하면, 내 스타일로 수업을 하면 되었다. 초등학생들에게 영어를 잘 가르칠 능력이 충분히 있으면서도, 다른 보통의 교사들과 같은 방식으로 수업을 하려고 했던 게 패착이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선생님들 수업 준비 때 참조하라고 100% 영어로 된 교사 지도서가 있기는 한데, 그대로 수업하면 정말 재미가 없다. 그 누구도 그렇게 수업하지 않게 교사 지도서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크게 도움받을 것은 없었다. 초등학교 영어전담 선생님들이 자료를 공유하는 사이트나, 원어민 강사들이 자료를 공유하는 사이트나, 아니면 영어회화 전문강사들의 카페가, 수업 자료 준비에 도움이 되었다. 이것은 출판사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계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교과서나 수업지도서도 다 정해 놓은 법 안에서 만들어야 하는데, 그 법이 규제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실제로 학생들의 영어실력을 증진시켜 세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발목을 잡고 있는 부분이 있다. 몇 학년 교재에는 얼마의 단어 수를 제한하여야지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던지, 어떤 표현까지만 가르치고 그 이상의 내용은 들어가서는 안 된다던지, 그런 규제들이 교과서를 실제 영어 화자들이 사용하지 않는 표현으로 누더기 영어 교과서를 만든다


지금 와서 반성해 보면 경력이 쌓여서 노하우가 생기는 동안에는, 근무시간에 수업과 업무 외에는 수업 준비에 올인했어야 했다. 퇴근한 후에도 수업 지도안을 쓰고 수업 안을 짤 때까지 쉬지 말았어야 했다. 교사가 기본적으로 수업만 잘하면 되는데, 다른 부분은 무난하게 처리했는데 수업만 잘 못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교과서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교사 지도서를 바탕으로  스타일로 재미있게 튜닝해서 수업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성실하게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삼 년에 풍월을 읊는 서당개처럼 13년 반 동안 영어교육과 다니며 귀동냥한 것과, 교생 실습하면서 고등학교에서 영어 가르치는 것을 실습했던 것과, 중고등학생들 영어 가르치는 방법대로 초등학교에서 조금만 놀이를 더하여 가르쳤다면 훌륭했을지도 모른다. 졸업과 취업 사이에 어설프게 TESOL을 배우다 그만두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되어 좋은 교사는 되지 못했다.




논산 안경점에서 안경을 고치며 ⓒ 최다함

첫 직장을

떠나게 되었다


교육청 정책 변화로 영전강과 계약을 연장하지 말라는 공문을 내 손으로 처리했다. 
어디를 가든 청춘이었던 내 눈예 예쁘던 여자가 한 명씩은 있었다.


교육감이 바뀌고 정책이 바뀌면서, 규정 이상으로 작은 학교에는 더 이상 원어민 교사를 두지 않겠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원어민 선생님은 일찌감치 떠나게 되어 다른 학교를 찾게 되었고, 나는 교장 교감 선생님 앞에서 공개 수업을 한 번 한 후에, 그다음 해 재계약을 하기로 했다.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하기는 하는데, 교장 선생님이 YES 하시면 그다음 해도 공개채용 없이 계약 연장이 되는 형태였다. 4년까지는 그렇게 연장이 되었다. 영어회화 전문강사들은 4년 후에도 새로운 공개채용 없이 재계약을 할 수 있어, 4년 간의 계약 기간이 끝나고 그 학교에 다시 시험을 보면, 물의를 일으킨 교사가 아니면 당연히 그 사람으로 간다. 4년 동안 학교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일 했으면, 더 좋은 교사가 와도 당연히 근무하던 교사로 가는 것이다. 교장 선생님께 재계약을 결정권이 있다 하더라도,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일 잘하고 있는 교사 대신에 신규 교사를 뽑는 일은 없다. 그런 절차로 2년 차 재계약을 하기로 했는데, 공문이 내려왔다. 정규 수업시수가 18시간 되지 않는 소규모 학교에는 영어회화 전문강사를 뺀다는 공문이었다. 창의적 체험 활동, 방과 후 수업, 유치원 영어 놀이 등은 수업 시수로 쳐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영어과 업무 담당자가 나였기 때문에, 그 공문을 처음 받아 처리하게 된 담당자가 다. 를 해고하라는 공문을 받고,  손으로 위로 결제를 올렸다. 그렇게 해서 나도 그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것 또한 하나의 병이었는지 모르지만, 어디를 가더라도 한 명의 여자는 예뻐 보였다. 무인도에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만 남으면, 전에 매력을 못 느끼던 상대라도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것처럼 말이다. 학교에는 교무실무사라고 교사의 행정을 돕는 분이 있다. 내 눈에도 그렇게 예쁜 것은 아니었는데, 잠깐 설렜였다. 그런 잠깐 의 설렘도 어떤 종류의 사랑이지만, 인생의 지축과 방향을 흔들 만큼 운명적인 사랑은 아니었다. 내 눈에 그렇게 예쁘지는 않았었다는 것은, 그분이 예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기는 하였으나, 내 인생에서 그렇게 운명적인 사랑은 아니었고 스쳐가는 설렘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인생에서는 운명적인 사랑과 어긋나고, 내 눈에 그다지 예쁜 것은 아니었으나 스쳐가는 설렘과 이어져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스쳐가는 설렘이 성장하여 운명적인 사랑이 되기도 한다. 그분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애감정까지는 아니고 썸이라면 썸 같은 감정은 있었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 학교에서 총각도 저 하나고, 처녀도 그분 한 분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행정실에도 처녀 몇 분이 계셨던 것도 같은데, 행정실과 제 교실 간에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가슴이 설레었다. 또 누군가 사귀고 사랑할 한 사람의 대상을 나는 갈구했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스치는 설렘이었지만, 가장 절정의 순간에는 결혼까지 생각했었다. 저 사람은 이러이러하게 괜찮으니 결혼대상으로 좋겠다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당시에는 그 사랑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랑하면 결혼이다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한 번 사랑이 시작되면 그 사랑의 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 사랑의 종착지는 결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이서 만나기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친한 선생님이나 기사님과 근무시간 후에 같이 나가서 맥주를 마시며 논 기억은 있다. 어느 날 회식 날이었는지, 아니면 친한 분들 몇 분과 개별적으로 안주와 곁들어 맥주를 마시러 간 날이었는지, 그분께서 술이 상당히 취했다. 나는 회식이 아닌 경우에는 겨우 술을 마시지 않을 정도로 술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회식 날이면 꺾을 때 꺾으면서 끝까지 살아남는 주당 술꾼까지는 아니었지만 술이 센 사람이었다. 그분은 술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술에 잘 취했다. 


그날도 많이 취했다. 술판이 끝나고 파장이 되었는데, 우리 둘만 따로 나가서 한 잔 더하기로 했다. 그분은 술이 좋고 흥이 좋아 저라도 한 잔 더 하자고 한 것인지, 그 순간이라도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썸의 감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둘이서 자리를 옮겨 한 잔 더하기로 했다. 나는 그날 어떻게 끝이 날지 모르기 때문에, ATM에 가서 통장에 모든 돈을 인출했다. 그 날이 아마도 월급날 근처였기 때문에 통장 잔고가 빵빵했었다. 결과적으로 잘한 것인지 못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이 완전히 술이 떡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인근에서 다른 장소를 찾는 대신에, 그분 집 근처 술집에서 한 잔 더 하기로 하고, 택시를 탔다. 인연이 아닌 사람과의 한 잔일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는 잘한 것이고, 인연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과의 한 잔이었다면 실수였을 것이다. 그분의 집 근처로 이동하지 말고, 그 근처에서 자리를 옮겨서 시간을 가진 후에, 다른 자리로 이동하였다면, 다른 인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택시를 태워서 그분의 동네로 이동했다. 아파트로 바로 가지 않고 인근 호프집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술이 떡이 되어 제 몸을 건사하지 못하던 상태라고 판단되어, 택시를 타고 바로 그분의 집 앞으로 갔다. 아파트까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 후에도 그날까지 합하여 총 세 번 정도 택시를 같이 타고 집까지 보내 주었다. 그분께서는 그런 나를 반길 때도 있었고, 그냥 가라고 혼자 갈 수도 있다고 할 때도 있었으나, 아무 말 없이 같이 택시를 타고 그분의 집 앞에 내려 집에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택시비는 내가 냈다. 


그즈음 내 마음이 타기 시작해서, 책 한 권을 사서 엽서 한 장 편지를 써서 마음을 전했다. 좋아하는데,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고, 싫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썼다. 거절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긍정의 답변도 보내지 않았다. 엽서에는 언제까지나 그분의 생각이 정리가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대답 안 해도 된다고 했지만, 가슴이 타 올랐다. 그래서 문자 하나를 보냈는데, 직장에서 불편하게 그러지 말아 달라는 류의 답변을 받았다. 거기서 더 이상 아무 메시지 보내지 말고 마음을 털어 버렸어야 했다. 그래야 아무 일도 없을 수도 있었고, 나중에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두면 그분의 마음이 돌아올 수도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렇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날 좋아한다 좋아한다 하면 그냥 한 발자국 물러 나는데, 그때 그 마음을 완전히 접은 듯이 물러나 자기 삶을 살면 며칠 후에 멋있어 보이고 자신도 심장이 뛰기도 한다. 아무 말 안 하고 거기서 물러났어야 했다. 


나는 딱 하나의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런 이런 모습이 좋았고 설렜던 것 같다, 잘 살기를 바란다, 고마웠다, 귀찮게 했다면 미안했다 등등의 장문의 미사여구를 썼다. 진심이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게 다 쓰고 나니까 삔또가 돌아버렸다. 미사여구의 장문의 메시지 뒤에 딱 한 마디 쌍욕을 날아갔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나지 않고 대강의 내용만 기억이 나는데, "십 대 빌어 먹기를 바란다." 이런 내용이었다. 장문에 진정성 있는 완전히 마음을 정리하고 좋게 헤어지는 메시지를 남긴 후에, 삔또가 제대로 돌아버려 나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고 날린 메시지이니, 당연히 지금 기억하고 있는 워딩보다는 강도가 쎘을 것이다. 쌍욕이었다. 


그 후에 잘못한 것 같기도 하고, 주변에 말을 전해 듣기로 대단히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하여, 사과할 마음이 있다는 의사를 표현하기도 했고, 원하면 친하게 지내는 가까운 사람들을 대동해서 만나서 진정성 있게 사과할 수 있다는 뜻도 전했는데, 마음이 완전히 상했었나 보다. 한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주변을 통해 어떤 말도 흘리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난 후에 직원 모임을 통해 자기가 몇 달 전에 어떤 일을 당했는데, 너무 화가 나서 교육청 사이트 게시판에 투서를 해서 뒤엎어 버리겠다는 의사표현을 조용하게 했다. 


마음이 상하면 그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것보다 무서운 것이 감정의 상함이다. 한 번 사람의 마음이 상하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다. 나는 장문의 메시지 하나를 썼다. 진정으로 좋아했었노라고. 그래서 그 마음을 전하고,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 정중하게 메시지 보내고 끝내려고 했는데, 나 자신도 모르게 화가 갑자기 치밀어 올라서 본능적으로 한 마디 쏟아낸 것이라고... 


내 인생 전체를 통해 운명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이지, 그 순간에는 그분을 내 최선의 마음으로 사랑했었다. 그 사랑 또한 그때 그 순간의 사랑이었다. 진정성 있게 사과함으로써 그분의 화도 풀렸다. 나도 그 학교를 떠났고, 그분도 그 학교를 떠나 다른 학교로 갔다. 그분은 그 학교에서 정말 오래 계셔서, 학교 구성원 중 그 누구보다도 가장 오래 그 학교에 계셨는데, 그다음 해 다른 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전근 가는 선생님들 송별 파티 겸 회식을 하며 노래방에 갔다. 그분을 생각하고 부른 것은 아닌데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을 불렀다. 술에 취하신 교감 선생님께서 그 순간 그 가사를 "최선생이 실무사를 사랑했지만"으로 연결하시며 가벼운 주사를 보이셨다. 마지막 회식 때 그분을 생각하고 부른 노래는 아니었지만, 결국 그분에게 내 마음이 그랬었다는 이야기를 모든 감정이 다 정리가 된 후에 노래로 표현하게 된 것이기도 했다.





새 직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내가 그 좋은 환경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되지 않으면
그곳에서 생존하기가 힘들다. 배울 것이 있는 일터보다,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는 일터가 좋을 수도 있다.


새로운 학교를 찾아서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았다. 두세 군데 학교에서 2차 면접을 보러 오라고 통보가 왔다. 어느 학교에서는 교장선생님께서 저를 아시고, 오라고 부르셨던 데가 있었다. 물론 공개채용이기 때문에 시험을 봐야 하고, 경쟁자가 있으면 당연히 경쟁을 해야 한다. 그 학교 교장 선생님 마음에 내가 들었다고 하여도, 나보다 월등이 뛰어난 사람이 있는데 나를 뽑을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명문대 졸업자라고, 토익 점수가 높다고, 단순히 영어를 잘한다고 뽑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직장에서 필요한 역량보다 스펙이 월등히 높은 사람은 부담스러워하다. 초등학교 영어교사로서 필요한 역량만 충족하면, 그 학교에서 필요한 인재가 있을 것이다. 나를 오라고 하는 학교에 갔어야 했다. 그 학교에 먼저 면접을 보고, 먼저 계약하기로 확정을 지었으면 그 학교에 갔을 것이다. 그 학교에서는 따로 지원자도 없었고, 제게 사전에 언 지를 주지는 않았지만, 형식적으로 시험 보는 절차를 거친 후에, 저와 계약을 하려고 의사결정을 해 놓은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런 상황을 몰랐던 나는 다른 학교에도 보험 삼아 원서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집 가까운데 초등학교 하나가 있어서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았다. 그 학교에도 지원자가 나 하나여서 나 혼자 시험을 봤다. 항상 지원자가 한 명은 아니고 대부분 복수일 텐데, 시기적으로 지원자가 없을 시기가 있었다. 또 운이 좋은 경우도 있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최종 면접을 보셨는데, 여기 학생들은 환경이 좋아 영어실력이 좋은 학생들도 많고 한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생각을 말해보라고 하셨다. 교장 선생님은 나를 시험하시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때 그 학교에서 다른 지원자가 없어서 나를 뽑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시기였는데, 실력이 조금 모자라 보이는 저에게 어떻게 학생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고 어떤 방법으로 영어교육을 할 것인가를 물어보셨다. 교장선생님의 결론은 어차피 당장 할 수 없는 실력을 키워 단점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내가 잘하는 강점을 살려서 아이들을 이끌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교육청 장학관 출신 교장 선생님이신데 유능한 분이셨다. 그때 나의 일생일대의 실수는 유능한 보스 밑에서 일하면, 내가 유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내 사수도 아니고 내가 직접 만날 수 없는 최고 결정권자이자 관리자인데 말이다. 물론 교장 선생님께서는 얼마 되지 않는 남자 선생님들 데리고 다니시는 것을 좋아하셔서, 개인적으로 교장 선생님 따라서 여기저기 다닌 것은 있으나, 업무적으로는 교장선생님과 직접 일할 일은 없었다는 의미이다.


영어 수업과 영어교과 행정 외에도 친목회 총무를 하게 되었다. 남자 선생님들이 얼마 되지 않고, 그렇다고 일이 많은 주임 선생님이 할 수도 없고, 바로 임용되어서 들어온 새파랗게 어린 솜털이 뽀송뽀송한 신삥을 시킬 수도 없고 해서, 영어회화 전문 강사라는 직종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비정규직 계약직 풀타임 영어교사였던 내가 친목회 총무를 맡게 되었다. 회식 장소 잡고, 분위기 띄우고, 학교 직원들에게 회식 장소 알리고, 그런 일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친목회에서 직원 여행을 갔는데, 여행 장소를 잡고, 친목회 회장과 교장 선생님과 함께 사전 답사하고, 그런 일들도 했다. 본 업무인 수업에 민원이 들어왔지, 그 외에는 잘했다. 동료 선생님들이 착해서 아무 말씀 안 한 것인지, 직접 이해관계가 부딪히지 아니니까 충돌이 없으셔서 말씀을 안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소속되었던 학년의 주임 선생님 외에는 저 때문에 어려우셨던 분은 없었던 것 같다. 주임 선생님께서도 좋은 분이셨고 나에게 형님처럼 인격적으로 잘해 주셨는데, 주임 선생님은 나가 일을 잘 못 하고 있고,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고 있었던 것을 깨닫고 계셨기 때문에, 또 그것이 주임 선생님 일에는 직접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좀 피곤하시지 않았나 생각도 해 본다.


친목회 회장님이신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형님 같은 선생님이 계셨다. 처음에는 나를 대놓고 경계하시는 것 같았다. 임용고사에 합격하신 정규 초등학교 선생님들께는, 영어회화 전문 강사라는 존재가 사실 불편한 존재이다. 영전강이 정규 선생님들께 본인들의 영어수업을 대신해주는 도우미이면서도, 임용고사 통과하여 정식으로 임용된 영어 잘하는 교사를 영어전담교사로 쓰면 될 것을 영전강이 빼앗는 다고 생각하실 수 있기 때문에 불편한 존재일 수 있다. 대부분 선생님들께서는 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하시지 않지만, 그분은 좋은 분이셨지만 성격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분이라 처음에는 나를 경계하시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마음에 드셨는지, 친동생처럼 대해 주셨다. 그 누구보다도 나를 아껴 주시고 도와주셨다.





1학년 여선생이

예쁘고 착했다


누군가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면, 성급히 다가가는 것 보다도
그이의 주변에서 그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멋진 사람이 먼저 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1학년 여선생님 한 분이 심각하게 예쁘고 착했. 이건 반칙이었다. 모델을 해도 될 분이, 교대를 졸업하여 학교에서 선생님을 하고 계셨다. 착하고, 예쁘고, 일도 잘하고, 능력 있고, 옷도 잘 입었다. 나이도 어리고 말이다. 나보다 8살 연하였다. 그런 분이 나를 당연히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런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도둑놈 심보인 것이다. 이 사랑은 스쳐가는 사랑이 아니라, 운명적인 사랑이었다. 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가 골병들어 쓰러져 전치 3달로 석 달을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의 데미지를 주는 사랑이었다. 그전에 여러 번의 짝사랑을 거치면서 이미 상사병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첫사랑 소녀 때 7년, 두 번째 사랑 아리따운꽃 때 3년, 아픔도 없었지만 아내를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 종료 시점도 없었던 3 번째 사랑 한효주, 정도로 길게 그리워하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3개월 정도 1학년 여선생님을 마음에 품은 후에 고백하기로 결정하고 기다리던 날에, 나는 그분이 내 마음을 알지만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준비했던 고백 타이밍 또한 빗나갔다.


항상 정답은 있었다. 그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내 삶에 충실했어야 했다. 떠나는 사람 붙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았어야 했다. 1학년 선생님 반은 1층 이쪽 끝에 있었고, 내가 있던 영어실은 꼭대기 층인 5층 저쪽 끝에 있었다. 소속이 그분은 1학년, 나는 6학년이었다. 동선 자체가 만날 수가 없었다. 가까운 곳에 인연으로 맺어질 수 있는 다른 분이 계셨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비교할 수 없지만,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내가 빠져들었던 1학년 선생님보다 나와 가까운 곳에 계셨던 다른 선생님께서 더 아름답고 훌륭하셨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1학년 선생님에게 마음이 가기 전에 그분을 보았더라면, 그분에게 꽂혔을지도 모른다. 그분이 나를 아직 알기 전에 그랬었더라면, 역시 도망갔겠지만 말이다. 내 사랑의 문제는 타이밍의 문제도 있었다. 상대방이 아니라고 느낄 땐 아닌 것이다. 그런 때는 내 일에 충실하면서 좌표 찍고 관찰만 하고 있으면 된다. 가깝게 다가올 그 타이밍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 타이밍이 오기 전 다른 인연이 찾아오면 환승하면 된다. 그게 그렇게 어려웠다.


어느 순간부터 항상 세상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덤프트럭이 나를 쳐서 비명횡사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내 인생의 종말 이기도 했다. 벽에 똥칠하지 않고, 고통 속에 비명 지르지 않고, 내가 죽는다는 사실도 모른 채, 순간 기억이 소멸되어, 심장이 멈추고 흙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이 당장 이르기를 나는 소망했다. 수차례 오늘 세상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그 계획을 실천해 옮겼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그분을 사랑했지만 그분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워하는 동안 해야 했고 해야 하는 학교 일이 쌓여 있었다. 내일 수업 준비까지 쌓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손까딱할 힘 조차 없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런 상황에는 며칠 연차를 쓰고, 마음을 추슬러 다음 주부터 출근하여, 한동안 다른 것 신경 쓰지 말고 내 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는 데에만 집중하면 되는데 말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후에, 어머니와 함께 응급실로 향하게 되었고,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바로 병원에 입원했던 것은, 집에서 쉬고 있다가 어떠한 계기로 약을 끊은 적이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조울증이 재발했다.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그 이후에 동생과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린 것 외에는 더 이상 직상생활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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