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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Dec 26. 2022

소녀 사랑

소녀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나에게 소녀는 사랑이었으나, 소녀에게 나는 사랑이 아니었으니, 짝사랑이었다. 이전에도 이성에게 설렘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감정과 이 감정은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러한 감정들이 대개 그렇듯이 세월이 흘러간 후에야 비로소 그때가 첫사랑인 줄 깨달았다.


소녀를 처음 알고 지낸 것은 고등학교 입학 직후였다. 같은 학교 같은 동아리 친구였다. 우리 학교는 공립학교였지만, 학교 특별활동 동아리에 기독학생반이 있었다. 대개는 원래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 가입했다.


기독학생반 중심 멤버가 주축이 되어,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학교 교실에서 모이는 학교 동아리 기독학생반과는 별도로, 아무 때나 어디서나 모이는 찬양단을 만들었다. 찬양단 모든 멤버가 우리 학교 학생이었지만, 학교와 상관없는 우리들끼리의 사조직이었다. 나와 소녀는 1학년 때부터 기독학생반과 찬양단의 멤버로 활동한 같은 학년 친구였지만, 그때까지는 소녀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나는 기독학생반 부회장이 되었고, 소녀는 회장이 되었다. 기독학생반 임원 활동을 하며 한 해 동안 우리는 자주 보았다. 지금은 카카오톡이 있지만, 그때는 손 편지를 주고받았다. 아직 고백을 하기 전이었고, 소녀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으니, 주고받았던 손 편지는 기독학생반 회장 부회장의 서신교환이지, 연애편지는 아니었다.


비가 오면 청소시간 땡땡이를 치고, 학교 앞 집으로 달려가 우산을 가져다 소녀에게 주었다. 동아리 모임을 학교 앞 교회에서 하기도 했는데, 내가 소녀에게 빌려 준 우산은 교회의 구석에 던져져 있었다. 

    

학교에서 야영을 갔다. 5월이었지만 산에 있는 밤의 야영장은 아직 춥다고 파카나 침낭 등을 챙겨 오라고 선생님들께서는 당부했다. 다른 아이들은 설마 하고 선생님 말씀을 귀로 흘려들었지만, 나는 침낭과 겨울 파카 둘을 가져갔다. 밤에 소녀가 있는 여자 반 텐트로 빨간 겨울 파카를 가져다주었다. 소녀는 웃으며 "고마워." 했고, 소녀의 텐트에는 다른 반 남자아이들 몇 명이 들어와 놀고 있었다.


작지만 페이지 수가 제법 있는 요즘 나오는 에세이 책 한 권 크기와 분량의 노트 한 권 샀다. 매일 한쪽씩 일 년 동안 소녀 한 사람을 위한 한 권의 책을 썼다.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소설도 썼다. 소녀의 생일 선물로 주려고 했지만, 결국 보내지 않았다. 다른 선물과 편지를 보냈다. 만약에 소녀 한 사람을 위해 손글씨로 쓴 한 권의 책을 소녀에게 보냈다면 나와 소녀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그 답은 알 수 없지만, 나는 지금의 나의 역사가 좋다. 그래서 후회나 미련도 없다.

    

소녀의 꿈은 기독교 음악을 하는 CCM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집의 반대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야간 자율학습 때 저녁 먹고 쉬는 시간에 음악실에서 연습을 했다. 소녀가 음악실에서 연습을 할 때면, 내가 교무실에 가서 키를 받아다가 열어 주고 다시 키를 교무실에 가져다주기도 했다. 재수를 할 때 소녀의 꿈을 위한 학원비라도 보태주려, 놋쇠 저금통에 동전과 포스트잇에 메모를 적어 넣었다. 1년을 모아 10만 원이었으니 1달 학원비도 안 되었을 것이다.


소녀도 재수를 했고, 나도 재수를 했고, 각자 대학에 갔다. 졸업을 하고 더 이상 우연히 마주칠 일은 없었다. 대학교 1학년 동안 나는 학과 공부나 학과 생활은 하지 않고, 컴퓨터 학과 수업을 듣고 컴퓨터 디자인 학원에 다니며 홈페이지 만드는 법을 배우려고 했다. 소녀에게 나의 마음을 고백하는 홈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1년을 보내며 조잡한 홈페이지 하나를 만들었다.     




나는 사랑을 가져다주었으나, 소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쓰레기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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