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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Dec 28. 2022

사랑의 끝에서 아내 에미마를 만났다

더 이상 내 인생에 사랑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으며, 스쳐가는 인스턴트 사랑이나 하면서 살기로 했다. 적당히 내 삶을 살다 보면, 사랑과 인연은 아니더라도, 스쳐가는 인연과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고, CGV에서 영화를 보고, 호프집에서 맥주 한 잔 하고, 그런 작은 사랑과 우정은 지나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운명적인 평생의 사랑과 결혼은 내게로부터 이미 멀리 떠나가 버린 것이라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사랑과 결혼을 포기했지만, 아버지 어머니의 생각은 다르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그런 여자를 만나면, 내가 조울증에서 회복되어 다시 어릴 때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착하고 순수한 영혼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믿으셨다. 내가 사랑을 하고 결혼할 상황은 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청춘이 아니시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신 노년의 부모님께서는, 내 곁에 부모님 대신 나를 지켜줄 아내를 만들어주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나는 조울증으로 인생이 너덜너덜 해졌기 때문에 사랑과 결혼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부모님께서는 오히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내게 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교직을 은퇴하시면서 남은 인생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사시겠다고 생각하셨다. 아버지께서 은퇴 후 돕기로 한 첫 번째는 이웃은, 귀농하셔서 철원에서 아로니아 오미자 농사를 짓고 계시는 둘째 고모 내외 분이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아로니아가 건강에 좋고 상품성이 있다고 소문나, 한때 너도 나도 아로니아를 심었다. 원산지에서 워낙 싸고 좋은 아로니아가 수입하여 들어오는 데다가, 아로니아가 생긴 것은 작은 포도처럼 생겼지만 열매로 바로 먹기에는 쓰고 맛이 없어 건강을 생각한 소비자들의 구매 수요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수요보다 공급이 넘쳤다. 둘째 고모 부부는 처음에는 아로니아를 주작목으로 오미자를 부작목으로 시작하셨는데, 지금은 아로니아 밭을 갈아엎어 오미자 밭으로 바꾸시고 있다. 오미자는 생과로도 팔지만, 오미자청으로 가공하여 판매하시고, 오미자 주스 용으로 음료회사에 밭떼기로 넘기시기도 한다.

    

둘째 고모부는 귀농하시기 전 사립학교 선생님이셨다. 고모 부부는 방학 때 해외봉사활동을 다니셨는데, 그중 한 곳이 네팔이었다. 고모부 부부가 네팔 단기선교 봉사활동 가셔서 만나서 지금도 절친으로 지내시는 네팔 선교사님 부부가 지금도 네팔에서 비즈니스와 봉사활동을 하고 계신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고모가 잘 아는 네팔 선교사님이 계시는 것을 아시고 ,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이 많은 네팔 여자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고모에게 부탁하셨다. 부모님께서는 한국 여자는 콧대가 높아서 나에게 힘들고, 네팔 여자에 마음이 꽂히셨다. 고모는 내가 네팔 여자를 만나 볼 확실한 의향이 있어야 저쪽에 말을 넣어 본다고 하셨는데, 사실 나는 글로벌 연애나 국제결혼은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사랑한 모든 여자는 한국인이었다. 외국인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기 보다도, 주변에 외국인 여자가 없었다. 그때까지 나의 여자의 개념에 외국인은 들어가 있지 않았을 뿐이다.

    

이미 내 인생에 사랑과 결혼을 포기했었다. 부모님 뜻대로 네팔 여자를 소개받을 생각이 없었다. 네팔 여자를 만날 생각 자체를 안 해 본 것이지, 네팔 여자가 좋다 싫다 판단을 한 것은 아니었다. 고모도 내가 뜻이 없으니 진행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나는 마음이 없었는데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일을 계속 추진하셨다. 한 번 소개나 받아 보자고 했다. 네팔에서 비즈니스와 봉활동을 하고 계시는 선교사님께서, 정말 훌륭한 여자 한 명이 있다고 하셨다. 나의 아내 에미마였다. 선교사님은 아내를 딸처럼 생각하고, 아내는 그분을 앤티 이모라 부르며 어머니처럼 생각한다.




네팔 선교사님을 통해서, 나는 에미마에 대한 정보를 들었고, 아내 에미마 또한 나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그동안 조울증으로 아프고 방황했던 모든 것을 그쪽에 전했다. 내가 조울증이 걸리기 전에는 훌륭한 청년이었고, 미래에 아내를 만나 사랑으로 회복되면 변화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내 잠재적인 비전을 그쪽에 전했다.

    

아내 에미마도 한국 남자와 결혼하여 한국에서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네팔인이 일자리를 찾아 외국인 노동자로 타국으로 많이 가지만, 트리부반 대학교에서 보건교육으로 석사과정을 마쳐가고 있었고, 물질적 가치보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가치에 욕심이 있었다. 네팔을 떠나 타국의 남자와 결혼해 타국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선교사님으로부터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아내 에미마는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성경말씀을 보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나를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아내는 자신이 나를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결혼하기로 했다.

    

선교사님으로부터 들은 아내 에미마에 대한 정보는 나의 마음을 열게 하였다. 아내에 대한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꼈다. 아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날 사랑하고, 그런 데다가 예쁘고 착한 여자였다. 내가 아내에게 마음을 열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사랑해 준 여자였다. 우리는 일단 만나서 안면을 트고, 커피 마시고 영화관에 같이 가고, 서로 사귀면서 평생을 같이 갈 사람인가 신중하게 검토한 후에, 결혼을 결정한 일반적인 루틴을 따르지 않았다. 아내는 기도를 하고, 나는 생각을 하면서, 사진 외에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고, 만나서 커피 한 잔 마셔보지 않고, 메신저로 메시지 한 번 교환하지 않고 사랑과 결혼을 결심했다. 사랑과 결혼을 결심한 후에, 카카오톡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2018년 6월부터 네팔과 대한민국에서 멀리 떨어져 카카오톡으로 랜선 연애로 사귀기 시작하였다. 9월 카트만두에서 양가 부모님과 함께 약혼식을 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고, 카톡으로 뜨거운 연애를 하고 있었고, 결혼하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에, 원래 계획은 바로 네팔에 가서 가족과 지인을 모시고 성대하게 약혼식을 하려고 했다. 국제결혼 행정수속의 도움을 받기 위해 행정사를 찾아갔는데, 행정사는 결혼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서류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번도 만나보지 않고 약혼식을 한다는 것을, 대사관에서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저런 이유로 계획했던 약혼식을 취소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약혼식이 아니더라도, 행정사 말대로 일단 한 번 가서 만나보는 것도 괜찮지 싶었다. 에미마와 나는 직접 만나보지 않아도 사랑이 굳건한데, 우리의 사랑을 서류로 증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게 되었고,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고,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났고, 이런 것을 서류에 써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남자에게 외국인 아내가 당하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외국인 여자가 한국에 오기 위해 사기 결혼하고 한국 국적만 취득 후 날라 버리는 경우를 막게 하기 위한 절차인 듯하다.




처음에는 나 혼자 가려고 했는데 이모들이 나 혼자 보내지 말고 돈이 많이 들어도 아버지 어머니도 같이 가라고 하셨다. 부모님과 함께 네팔에 갔고, 아내 쪽에서도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오셨다.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우리를 소개해 주신 선교사님 부부와 카트만두 한국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으로 약혼식을 했다. 장인 장모님을 고향으로 보내 드리고, 아내와 부모님과 히말라야 관광도시 포카라로 약혼여행을 떠났다. 2018년 6월부터 카카오톡으로 연애하기 시작하여, 네팔 카트만두에서 9월 약혼식을 하고, 12월 다시 부모님과 네팔에 들어와 결혼식을 했다. 네팔 결혼식을 마치고 부모님은 한국에 돌아가시고, 아내 결혼비자 수속과 대학원 논문 통과를 진행하면서, 네팔에서 6개월 동안 신혼생활을 했다. 네팔 말을 몰라서 아내 외에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도 잘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가, 마음이 열려서 영어로 이런저런 대화를 네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시도할 즈음되니, 우리가 한국으로 올 때가 되어 버렸다.

    

2019년 5월 아내와 손을 잡고 인천공항에 함께 들어왔다. 그해 6월 네팔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초대하여 수원에서 한국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으로 한국에 오신 기회에 여기저기 구경을 시켜 드렸다. 에버랜드에도 가고, 잠실 롯데타워의 전망대와 아쿠아리움에도 갔다. 수원 집에도 며칠 계시고, 논산의 농장에서도 며칠 함께 하셨다. 외국인 손님이 오면 많이 모시고 가는 경복궁은 가지 않았지만, 대신 수원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차로 드라이브하며 구경시켜 드렸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매우 즐거워하셨는데, 그 가운데 가장 즐거워하셨던 것은 롯데타워 아쿠아리움이었다.

    

장모님 장인어른을 네팔에 보내 드리고, 우리 부부는 주중에는 부모님과 논산에서 왕대추농장 일을 하고, 주말에는 수원에서 쉬면서 교회를 다녔다. 부모님께서는 우리의 평생 사업장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왕대추농장을 시작하셨고, 우리는 부모님의 노후생활을 함께해 드렸다. 우리 부부는 한 달에 두 번은 동생 사업장에 가서 쓰레기 분리수거와 청소를 해주었고, 동생 부부는 우리 부부를 경제적으로 많이 도왔다. 네팔에서 아내와 함께 귀국한 2019년 하반기에는 가족과 사랑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2020년 한 해를 시작하며 아내와 나는 수원에 올라와 도시에서 우리의 길을 찾기 시작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아파서 직장이 없는 큰아들을 위해 왕대추농장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내려간 고향 논산에서 정착하셔서 노후생활을 보내고 계신다.

사랑이라는 무지개를 찾아 떠난 여행을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와 내 인생을 살기 시작하였을 때, 사랑의 끝에서 나의 사랑 나의 아내 에미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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