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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Dec 28. 2022

다함 왕대추농장

더 이상 내 인생에 사랑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으며, 스쳐가는 인스턴트 사랑이나 하면서 살기로 했다. 적당히 내 삶을 살다 보면, 사랑과 인연은 아니더라도, 스쳐가는 인연과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고, CGV에서 영화를 보고, 호프집에서 맥주 한 잔 하고, 그런 작은 사랑과 우정은 지나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셨다. 아버지께서는 학교 근무하시면서, 야간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하셔서, 평일에는 학교에 근무하시고, 주일에는 개척교회 목사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셨다. 투잡은 아니었다. 교회에서 그 어떤 보수도 받으시지 않으시고, 봉사활동을 하셨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님으로 평생 학생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셨고, 교회에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셨다. 아버지께서 개척하신 예사랑교회 이름의 뜻은 예수님 사랑 이웃사랑이었다. 

    

아버지께서 교장선생님으로 은퇴하시면서, 하나님께로 받은 사명이 있으셨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 가실 때까지 인생 노년을 이웃을 돕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가장 돕고 싶은 이웃은 나였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어른 가운데 나를 존경하는 분도 계셨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소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나는 상사병에 걸렸고, 소녀를 향한 상사병과 군대에서의 정신적인 집단 괴롭힘은 조울증이 되었다. 꾸준한 약물치료와 아내 에미마의 사랑으로 조울증은 조절과 관리가 되어 극복하였으나, 일할 의지와 능력은 있었지만, 취직할 길을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나를 위하여 스트레스 안 받는 건강한 평생직장을 만들어 주고 싶으셨다. 그런 이유로 교직에서 은퇴하신 후, 나를 데리고 다니시며 함께 이런저런 귀농교육에 받으셨다. 아버지 덕분에 나는 400시간 이상의 귀농교육을 받았다. 지금은 청년이 아니라 장년이 되어 더 이상 대상이 되지 않지만, 30대 청년이었을 때 청년 창업농에 선발되었으면, 3억까지 초저리로 대출받을 수 있었다. 물론 담보대출이다. 아버지께서는 나의 평생직장을 위해서, 아버지 고향이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할머니와 평생 사시던 논산 시골집으로 귀농하셨다. 나의 평생직장으로서 왕대추농장을 만들어 주려는 목적이었다. 동생은 스스로 잘 살고 있고, 아픈 아들 나를 돌보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버지께 감동 주신 정년퇴직 이후 제1사명이셨다.




농촌에 어쩌다 한 번씩 가는 것은 좋았지만, 농촌에서 농사지으며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당장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아버지 어머니와 노후를 함께 보내 드리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따라다녔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사랑하셔서 건강한 평생직장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시골 논산집에 왕대추농장을 만드셨고, 나는 부모님의 노후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왕대추농장 일을 도와드렸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길로 갔다. 에미마와 2018년 12월 네팔에서 결혼하고 2019년 5월에 한국에 들어와서 그해까지는 아버지 말씀대로 따라갔는데, 2020년부터는 나와 에미마의 길을 찾아 부모님을 떠났다. 부모님 집을 떠나서 독립한 것은 아니고, 부모님은 논산 시골집에 살고, 에미마와 나는 수원의 부모님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전적으로 나를 위하여 왕대추농장을 지으셨지만, 왕대추 작목도 아버지께서 선정하시고, 귀농 라이프 자체가 아버지 취향에 맞는 것이었지 내가 취향에 맞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는 귀농해서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며 사는 삶이 건강하다고 생각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컴퓨터 앞에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하면 건강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셨고, 농장에서 육체적인 노동을 하면서 땀을 흘리면 몸과 마음이 건강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나는 반대로 육체적 노동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하는 일을 잘하고 스트레스받지 않고 행복하다.

    

귀농 교육은 아버지와 함께 받으러 다녔는데, 정작 농장을 시작하고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초기 작업을 할 때, 나는 참여할 수 없었다. 그 시기에 네팔에서 결혼하고, 아내가 비자 수속과 논문 통과하는 6개월 동안, 네팔에서 아내 에미마와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2019년 5월 아내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2019년 하반기 반년 동안 논산과 수원을 오가면서, 아버지 왕대추농장 일을 함께 했다. 2020년에는 국비지원 저소득층 구직활동인 취업성공 패키지에 참여하며 구직활동을 하였다. 2020년 가을 출판편집디자인 직업훈련을 마친 후, 왕대추 수확 기간에 논산에 내려가 부모님을 도와 드렸다.




결국 아버지께서 나의 평생직장을 위해 만드신 왕대추농장을 떠나 우리 길을 찾아갔지만, 왕대추농장을 했었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아내 에미마를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평생직장을 위해 아버지께서 만드신 왕대추농장은 나에게 경제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지만, 왕대추농장에서의 시간은 나의 건강이 회복되는 요양의 시간이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스스로 내 갈 길을 찾아, 부모님께서 농사지으시는 아버지 고향 논산 시골집을 떠났다. 왕대추농장 일을 하면서 내 마음과 몸이 힐링되어 건강해져서, 역설적이게도 왕대추농장을 떠나 내 살 길을 찾아 떠나게 되었다. 아내와 논산 왕대추농장을 떠나 수원 집으로 돌아갔지만, 아버지께서는 왕대추농장의 이름을 아버지 성함이 아닌 내 이름을 따서 다함 왕대추농장이라 지으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생각하시는 방식이다. 아버지 정년퇴직 이후 아들의 평생직장을 만들어 주고자 시작하신 왕대추농장에서, 아들 손자 며느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시골 동네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시며, 왕대추 농사를 지으시며,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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