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스마트폰으로 도서관에서 밀리의 서재로 읽던 책을 계속 읽으며 걷고 있었다. 아들 요한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오는 아내 에미마를 만났다. 스마트폰 보며 걷느라 아내와 아들도 못 본다고 아내에게 혼났다. 나도 여느 집 남편들처럼 가끔 아내에게 꾸지람을 듣고 산다.
요한이 유모차를 내가 대신 밀며 아내를 따라갔다. 어디 가나 했더니 교회로 가는 길이었다. 수요예배 드리러 가는 길이었다. 우리 교회는 수요예배를 6시 30분에 일찍 드린다. 난 어떤 때는 오늘의 요일도 모르고 사느라 어제가 수요일인지도 몰랐다. 회사 다닐 때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며칠을 견뎌야 주말이 오는지 자동으로 계산이 되었는데, 도서관에서 책 읽고 생각하고 글 쓰는 배고픈 천국에 살고 있는 나는 어느 날은 날짜와 요일 계산이 안 된다. 매일매일이 천국이니, 지옥의 평일이 지나고 천국의 주말이 오기를 계산할 필요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요예배를 드린다. 찬양을 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한다. 말씀을 듣는 시간에는 요한이를 아기 의자에 묶어 두고 과자를 주고 그림을 그리게 하지만,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는 동안에는 답답한 요한이를 풀어 준다. 작은 교회이고 교인들이 가족과도 같은 교회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는 천사가 두 분 있다. 교회에 드나드는 노숙자를 우리 교인들은 천사라 부른다. 한 분은 탈북인이고, 한 분은 나이가 지긋이 드신 분이다. 탈북인 천사는 우리 교회를 드나든지 오래되었고, 나이가 지긋하신 천사는 얼마 안 되었다. 두 분 다 돈만 타가는 분들은 아니고, 예배를 드리고 가는 분들이라, 우리 교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이가 있으신 천사는 찬송을 부르고 아멘을 하는 것을 보면 전에 교회 다니시던 가닥이 있다. 교인들은 나이가 있으신 천사에게 선생님이라 부른다.
아들 요한이가 천사에게 다가가면, 천사가 아들 요한이를 귀여워하며 손을 뻗는다. 아내 에미마는 아무 말 안 하지만, 나의 마음은 그렇게 달갑지 않다. 나도 겉으로 달갑지 않은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르는 말 많으신 집사님 한 분이 계시다. 우리 교회를 다니시는 것은 아니고, 아버지가 집사님일 때 같은 교회를 다니시던 분이다. 그분은 어린 시절 나를 기억하시면서, 길에서 어려운 사람 만나면 가서 도와주고 그런 이야기를 지금도 나를 만나면 하시는데, 나는 아주 민망해 죽겠다. 어렸을 때는 내가 그렇게 인류애가 넘치는 소년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지하철에서도 어르신이나 여성에게 절대로 자리를 내주지 않는 차가운 도시의 장년이 되었다.
천사를 경멸하지도 않지만, 천사에게 따스한 인류애를 가지지도 않는다. 그냥 아무 관심이 없다. 그게 지금 나다. 그런데 천사가 내 귀여운 아들을 귀여워하며 손을 내밀면, 아무 말이나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내 마음이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