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를 꿈꾼지 2년째다. 대학교 2학년 당시 전공수업 팀플을 준비하며 기자라는 직업을 생각한 것을 시작으로, 7개월째 언시대비 상식 스터디를 하고 있으며 현재 언론사에서 인턴으로 근무 중이다.
형편없는 워라벨, 높은 업무강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조명(照明)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들을 조명해 기사로 담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하면 잠을 좀 줄여도 행복할 것 같았다. 전공을 살려 경제부, 산업부, 국제부 등에서 일하길 지망하지만 사실 '일하고 싶은' 부서보다, '일하기 싶은' 부서가 더 명확했다.
연예부였다. 연예부에서 일하느니 기자가 되지 않겠다 생각했다.
물론 승리 단톡방 사건을 최초 보도한 강경윤 기자 같은 분들도 있다. 많은 남성 연예인들이 모범이 되기는 커녕 앞장서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요즘 같은 시점에, 그것들을 고발하는 몇몇 연예부 기자들의 공이 크다는 사실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 빈도 수를 보면, 연예인들과 사회가 얽혀 저지른 범죄를 밝혀내는 기자들보다, 연예인 특히 여성연예인의 인스타에 수시로 들어가 그들의 자잘한 일상을 기사화하는 기자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연에인의 사진, 심지어 라이브 방송 중 캡쳐 화면. 영상까지도 기사화되어 포털사이트에 돌아다닌다.
고(故) 설리 씨는 '실검 단골'이었다.
그가 인스타그램에 무엇을 올리든 기자들은 기사화 시켰고, 대중들은 클릭했다. 그가 실검에 올랐던 일 중 좋았던 일이 몇이나 됐을까. 기자와 대중의 합작품이었던 실시간 검색어는 관심으로 포장된 칼날이 되어 그의 목을 겨눴다. 인스타에 무엇을 올리든, 그것이 합법적인 행동이라면 표현의 자유로 인정받아 마땅한데 대중은 유독 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게(탈유브라)가 왜, 기사거리가 돼야 할까? 기자들은 그것을 왜 기사화할까? 사실 그들도 이 해프닝이 기사화될 이유가 전혀 없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회수를 놓치기 아까웠을 거다. 설리라는 이름이 가져오는 대중의 관심, "설리가 또?" 를 연발하며 어느새 기사를 클릭하고 있는 대중의 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기자가 연예인들의 일상을 '자극적'으로 기사화하는 관습이 먼저 존재했을까, 아니면 그 기사를 읽을 준비가 돼있는 대중들의 수요가 먼저였을까. 두 요인 모두 문제임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무엇이 먼저 문제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인걸까.
어그로를 끌고 싶은 기자일까, 자극적인 글을 찾는 대중일까.
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 와 같은 질문을 오늘 스스로에게 계속 던졌다.
아직 답은 찾지 못했지만 한가지는 명확했다. 설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사화해서 이슈로 만들어낸 기자, 그 '이슈'들에 혈안이 돼서 악플을 남긴 대중 모두 '죽음을 먹는자' 다. 설리 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연예인으로 대표되는 피해자의 고통을 먹고 자랐다. 사실 거기서 멈췄으면 '고통을 먹는 자' 였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모 경제지의 현직기자에게 들은 얘기다. 언론중재위원회에서 그의 죽음을 그만 보도하라고 했단다. 이미 그의 비보(悲報)에 대해 많은 기사가 나와있어 사회 분위기가 너무 침체됐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의 비보에 대한 보도가 어느정도 이루어진 만큼, 이제 더이상 기사를 쏟아내지 않는 것이 떠나간 이와 그의 가족들을 위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 그런데 언론사들이 정말 그 말을 들어요? "
" 잘 안들어요. 아무래도 조회수에 신경을 쓰니까. 연예부서가 언론사 수익의 90프로를 차지한다는 말도 있어요. "
역시나. 그들은 공인 혹은 유명인이 떠나간 후에도 그의 죽음을 이용해 조회수를 끌어내는 이들이다. 국민이 관련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게 된 후에도 보도를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유튜버들은 고인의 이름을 이용해 콘텐츠를 만든다. 사람들은 또 그 콘텐츠를 소비한다. 그들이 죽음을 먹는 자인 이유이다.
나 역시 누군가의 죽음을 먹고 자라는 이가 될까 두렵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싶은 나지만,
그 날이 온다면
과감하게 펜을 꺾어야지 결심했다.
내가 정말로 기자가 된다면
조명할 것을 조명하는 기자가 되겠다
무거운 마음으로 다짐한다.
* 설리씨가 실검에 자주 등장했다는 것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방송 캡쳐본 하나를 사용합니다.
고인의 사진이라 조심스러운 마음입니다. 제 글이 그를 이용하는 또 하나의 '콘텐츠'가 아닌 '자성의 목소리'로 읽히도록 무거운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