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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finder Nov 16. 2019

버드 박스가 인생영화인 이유

넷플릭스 영화 버드박스 해석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인 <버드박스> , 드디어 봤다.
하루가 끝난 밤, 불을 완전히 끄고 침대에 누워서 봤는데 특유의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분위기 때문에 심장이 아픈 느낌이었다. 빠른 전개와 초반의 자극적인 장면 덕분에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았음에도 200%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후기를 찾아보니 부정적인 평가 역시 존재하는 듯 했다.
덕분에 나도 버드박스라는 영화에 대해 더 고찰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영화는 내 '인생 영화' 중 하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부터 왜 <버드박스>가 내 인생 영화가 되었는지, 몇 가지 이유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이유들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장면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1. 악령의 정체, 구체적인 생김새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이는 이 영화에 대해 "악령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주인공들이 악령와 싸울 다른 방법은 없는 건지"  궁금해했다. 나 역시 그 의문에 대해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본 결과, 악령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리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는 악령에 대해 아예 모르지 않다.
악령을 볼 수 있는 게리가 이미 그림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일반인'인 척 집에 들어온 게리가, 스케치북을 꺼내 악령을 그린 그림들을 테이블에 펼쳐볼 때의 충격이란.


사실 그 바로 전 장면부터 게리가 수상하다고 느끼긴 했다. 바로 위층에서 맬러리와 올림피아, 무려 두 여성의 그 긴박한 진통 과정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트는 장면.

생각보다 영화에서 '클래식 음악'은 정신이상자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레옹>에서도 악역은 클래식을 즐겨 들었고, <킹스맨>의 악역 역시 마찬가지다.


클래식 음악이 지닌 평화롭고 잔잔한 분위기가 긴박하고 위태로운 상황과 대비될 때, 그 이질감이 배가 되어 청자에게 공포로 다가오는 것 같다.



다시, 게리가 그린 그림들로 돌아가 보자. 악령을 그리기 위해서는 '보아야 한다'.
즉  게리가 악령을 볼 수 있는 싸이코라는 사실과, 악령의 모습 두 가지를 모두 보여주는 장면인 것이다.

악령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청자의 공포감을 유도하면서 몰입감을 높일 수 있는 좋은 장치였다. 원래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가장 무섭다고 하지 않은가.

게다가, <버드박스>는 결국 위기 상황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영화이다.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싸이코들의 등장으로 더욱 심화된다. 악령은 그들이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고, 눈을 가려야만 하는 설정을 이끌기 위한 도구 정도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2. 정신병자들이 악령을 볼 수 있었던 이유 : 그들 역시 ‘악’이다.


완벽하게 선한 인간은 없기에, 극 중 일반인들을 '선', 싸이코들을 '악'으로 쉽게 규정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악'에 훨씬 가깝게 묘사된 인물들이 싸이코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악'이라고 설명하고자 한다.


악령을 보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자살한다. 그래서 그들은 살기 위해 눈을 가려야만 한다.
그러나 싸이코들은 오히려 악령을 보며 "너무 아름답다."고 한다.
한 술 더 떠서, "모두가 이 아름다운 존재를 봐야 해!" 라고 소리친다.




싸이코들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이들이다. 이미 그들의 정신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분별하기 어려우며 심지어 그들은 악한 것을 선하다고 인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쩌면 싸이코들 자체가 '악' 이기에, 악령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낀 것 아닐까.



또한 한 가지 더, 본인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 악령을 보고 자살을 택한다.
싸이코들은 악령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며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본인들은 아무런 부정적 영향도 받지 않으니, 그들에게 있어 얼마나 재미난 일이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찾아 억지로 눈을 뜨게 한다.


3. 새가 악령에 반응하는 이유: 그들은 '악'과 대비되는 존재이다.


'악'과 대비되는 존재, 혹은 '선'과 연결되는 존재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새들은 악령에 가장 먼저 반응한다. 멜러리가 마트에서 그들을 집으로 데려온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 멜러리와 아이들이 은신처를 찾아 떠날 때, 방향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 역시 새의 역할이다.



새가 왜 악령에 반응하는지, 과학적으로 분석할 필요는 없다.
영화에서 설정된 상징성을 이해하고, 그 상징을 즐기면 그걸로 충분하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진행된다.


영화는 충격의 연속이다.
아주 많은 이들이 자살하고, 마치 '종말의 순간'에 다가온 듯한 상황이다. 영화 후반부로 흐를수록 상황은 악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러리는 필수품을 구하기 위한 여정 가운데 실크 원피스 같은 옷을 챙겨 온다.
톰은 묻는다.
"그런데 이건 뭐야?"
멜러리는 답한다.
"순전히 생존용이야."

그리고 그들은 키스한다. 지구 상에 그들과 아이들만 남은 것 같은 절망적인 순간에도,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의 행위 역시 이어진다.

5. 이름에 대하여: '걸', '보이' 에서, '올림피아', '톰'으로


맬러리는 두 아이의 이름을 따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편의상 여자아이는 '걸', 남자아이는 '보이'라 칭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정신이 이상한 여자' 라며 맬러리를 비난하는 후기 또한 읽었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는 김춘수의 <꽃>의 내용처럼,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큰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큰 희망이 없는 상황 가운데, 맬러리가 그들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것은
아이들에게, 그들 자신의 삶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고, 꿈꾸게 하는 톰과 맬러리의 갈등에서도 이를 찾아볼 수 있는
맬러리는 톰에게,
"그러면 아이들은 살아남지 못해." 라고 이야기한다.
행복한 것도, 꿈꾸는 것도, 그 무엇도 아닌 단지 '살아남기'가 목표인 삶이었다.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 것이 '살아남기'에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들이 결국 은신처를 찾아냈을 때
맬러리는 '걸'에게는 '올림피아'의 이름을, '보이'에게는 '톰'의 이름을 붙여준다.
이는 맬러리 자신에게 매우 소중한,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그들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아이들을 더욱 사랑하겠다고 다짐한 것일지도.


6. 결말에 대하여: 지구 종말의 날, 모든 것이 바뀐다

나는 결말이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그들이 악령과 어떻게 싸워나가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적절한 장면에서 영화를 깔끔하게 마무리지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은,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분명 큰 리스크를 안고 살아간다.
그들이 느끼는 크고 작은 불편함도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악령을 '볼 수 없는' 그들은, 악령의 위협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마치, 지구 종말의 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서열'이 완전히 뒤바뀐 느낌이었다.


또한, '눈'의 부재로 인해 생명을 지킬 수 있다면, 볼 수 없는 현실이 무조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성경 구절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리라."




<버드박스> 는 분명 완벽한 작품은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게는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하는 힘을 가진 영화였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대부분의 재난영화에서 그렇듯 이 영화 역시, 고정적인 성 역할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성은 주로 '감정적이고 따뜻하며 타인을 배려하는 이'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
남성은 주로 '논리적이고 강인한 이'로 묘사된다.



올림피아는 생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겠답시고 게리를 집에 불러들여
본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죽음을 불러온다.
셰릴 할머니 역시 게리에게 연이코 나가라고 하는 더글라스를 기절시킨다.
반면 더글라스는 낯선 외부인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톰은 끝내 살아남아 맬러리와 아이들의 보호자가 된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은 <부산역> <콰이어트 하우스> 등 많은 스릴러, 재난 영화에서 등장한다.


보다 강인하고 논리적인 여성, 마음 따뜻하고 타인을 배려해 그 과정 속에 실수도 하는 남성은
아직까지 작품 속에서 자주 찾아볼 수 없는 설정인 것 같다.



어쨌거나, 버드박스는 내게 종종 기억 중에 떠오를 것 같은 영화로 남았다. 이렇게 리뷰를 쓰고 싶게 하는 영화도 참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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