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깔끔한 영화다. 영화의 구성도, 연출도 군더더기가 없다.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느낌도 없이 한국영화 특유의 질퍼덕함 없이 깔끔하다. 마냥 밝지 않은 줄거리임에도 관객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영화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는 집이 없다. 사실 있었는데 없어졌다. 가난해도 담배와 위스키를 끊을 수 없어 집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추워서 섹스를 못할 정도로 볼품없는 집이었지만, 치솟은 월세에 그마저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남자친구와 같이 살고 싶어도 남자친구 한솔 역시 회사 기숙사를 전전하는 신세다. 길거리에서 잘 수는 없으니 대학 시절 같이 밴드부를 했던 멤버들에게 연락을 한다. 그렇게 미소의 '여행'이 시작된다.
본 리뷰엔 스포가 있습니다
첫번째 여행 도전 - 실패
먼저 문영을 만났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문영을 찾아가 며칠이라도 재워달라고 말했다. 문영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잘 못잔다며 거절한다.
두번째 여행지: 친언니 같은 친구, 불편한 현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현정의 집이다. 현정은 미소를 가장 진심으로 대해주는 친구지만, 애석하게도 집 상황이 좋지 않다.
남편에 시부모까지 모시고 사는 편에 미소가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남편은 현정에게 "적어도 나한테 말은 하고 데려왔어야지"라며 성을 낸다. 현정은 학창시절 좋아했던 키보드 연주도 잊어버리고 퍽퍽한 삶을 살고 있다. 미소는 결국 반찬거리를 해놓고 그 집을 나온다.
세번째 여행지
그리고 대용의 집. 방 2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방이 아닌 다른 방에 기거하면서 미소에게 안방에서 자라고 한다. 밤만 되면 방에서 좀처럼 나오질 않는다. 알고보니 대용은 결혼한지 몇개월 만에 아내와 이혼해 매일 밤을 술과 담배로 지새우는 것이었다.
미소는 대용을 위해 아침을 해주고, 밤에 말동무가 되어준다.
영화표를 받기 위해 헌혈 중인 미소와 한솔. 웃픈 장면이다
하지만 남자와 같은 집에서 머무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한솔로 인해 그 집도 떠난다. 자신의 온기를 남겨두고.
네번째 여행지
네번째로 방문한 '여행지'는 록이의 집이다. 록이 역시 부모님과 같이 산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무관심했던 현정의 식구들과 달리 , 록이의 부모님은 미소에게 지나치게 살갑게 대한다. 진수성찬을 차려주고 끊임없이 웃음을 보인다.
그런데 미소가 자려했던 드레스룸에는 엄청난 양의 고추가 말려져있다. 할 수 없이 미소는 록이의 방에 들어간다.
"야, 우리 결혼할까?"
"왜 그런 말을 해? 나 남자친구 있어."
"응. 그래 연애는 남자친구랑 하고, 결혼은 나랑 하면 되겠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야, 우리가 막 뜨겁게 사랑할 그럴 나이는 지났잖아. 뭐, 우리 둘이 알고 지낸지 10년 됐고, 10년동안 좋은 감정 유지하고 있으면, 뭐. 이런게 사랑이지."
"그래서?"
"우리 부모님 저렇게 들뜬 모습 본지 10년 만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며느리 한번 보고 싶다는데 그 소원도 들어드리고 싶고."
"난 갈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중인거야."
"아이고, 네가 젊어서 좋다. 그냥 무, 조촐하게 식 올리고 이렇게 들어와서 살면 되겠구만. 지금 너랑 나랑 제일 중요한 게 안정감이야, 안정감."
"오빠 나 떠돌아다닌다고 너무 막말하는 거 아니야? 내가 무슨 물건이야? 집이 있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야, 너 그렇게 철부지 처럼 생각하지 말고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봐. 너 이렇게 다 받아주는 시부모 만나는 거 이거 진짜 쉽지 않다. 이런 것도 기회야, 기회. 집 생기지, 가족 생기지 다 준비돼있구만."
미소와 록이의 대화. 어느 한 마디도 버릴 게 없다. 미소와 록이가 얼마나 정반대의 가치관을 견지하며 살아가는 인물인지 보여주는 대사들이기 때문이다. 록이는 '때가 찼고', 부모님이 좋아하시니 결혼하자고 말할 정도로 안정감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반면 미소는 "뜨겁게 사랑할 나이는 지났다"는 록이의 말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사랑과 순간의 행복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이 장면을 본 사람이면 육안으로 미소와 육이의 나이 차가 굉장히 많이 나보인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동시대에 대학을 다녔을 둘의 실제 나이차는 기껏해야 2-4살이겠지만, 록이에게 미소는 '철부지'인가 보다.
다음 날, 미소는 문이 잠긴 것을 발견한다. 아들 록이의 결혼을 간절히 바랐던 부모님들이 문을 꽁꽁 잠궈두고 외출한 것. 참, 피말리는 집안이다. 미소는 결국 창문을 열고 탈출한다.
다섯번째 여행지
마지막 여행지는 정미의 집이다. 가장 편하지만 가장 불편한 곳. 돈 많은 남편과 결혼한 정미는 좋은 집에 살지만, 알게 모르게 남편의 눈치를 엄청 본다. 미소는 (역대급으로) 오래 머물며 가사도우미로 번 돈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하지만 찰나의 안정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쩍 까다로워진 정미는 식사자리에서 남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 미소에게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다. 뜨거운 사람이었고, 기타를 쳤다. 나쁜 얘기도 아니었건만 그들의 세계에선 금기어였던걸까.
"너 아직도 위스키 마셔? 담배는 아직 피더라."
"응"
"요즘 담뱃값이 많이 올랐다던데 집이 없을 정도로 돈이 없으면, 나같으면 독하게 끊었겠다 야.'
"알잖아, 나 술 담배 사랑하는 거."
"아이고, 그 사랑 참 염치없다 야."
"뭐가 없어?"
"나 그냥 솔직하게 말할 게 미소야. 나는 네가 염치가 없다고 생각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술담배라는 것도 솔직히 진짜 한심하고, 그것 때문에 집도 하나 못 구해서 우리 집에 와서 지내면서 그런 것까지 다 이해해주길 바라는 네가 뭔가 좀 잘못됐다는 생각 안 드니? 잘못 됐더라."
"미안해. 난 언니가 그렇게까지 불편해할 줄 몰랐어."
"아니, 왜 몰라, 그걸? 방이 아무리 많고 집이 아무리 넓어도 남이 우리 집에 오랫동안 있으면 신경이 쓰이는 법이야. 그걸 왜 모르니, 너는?"
"난 아니니까. 난 아무리 좁은 방에 친구들이 와서 자도 그냥 반갑고 좋으니까."
"그렇겠지. 너는 가정이 없으니까 모르겠지. 혼자만 살아봤으니까."
정미는 차가운 말을 쏟아내며 보증금에 보태서 빨리 방 구하라며 백만원 수표를 준다. 미소는 수표를 거절하고 집을 떠난다. 그리고 원룸을 구하려 하지만 500만원의 보증금이 없다. 가사도우미로 일하던 집이 팔리면서 일자리도 잃어버린다. 남자친구 역시 돈을 벌기 위해 사우디로 출국한 상황. 참 엎친데 덮친 격이다.
결국 결말에 잠깐 비치는 미소는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머무른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끊임없이 여행하는 이는 늙지 않는다. 영화 속 미소는 밴드부 멤버들에 비해 유난히 어려보인다. 나는 배우 이솜을 주연으로 캐스팅한 것 자체가, 남들과 다른 미소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친구들이 대기업에 다니고 이미 결혼해 아파트에 살고, 아이까지 낳는 동안 미소는 여전히 '어리게' 살아간다. 머리를 수놓은 한 줌의 흰머리를 제외하고 유난히 동안인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가 생각하고 재단하는 행복의 기준은 참 획일화되어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매달 나오는 월급, 가정과 안정적인 삶. 그렇다보니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이 참 좁다. 미소는 그 좁은 문을 비집고 들어가다 몸에 생채기가 나느니, 자신만의 문을 만드는 것을 택한 사람이다. 그런 미소를 "철이 없다" 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보통사람'과 다르니,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하지만 누가 미소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남자친구 한솔, 담배와 위스키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미소에게 과연 누가 "행복의 기준을 달리하라"고 강제할 수 있단 말인가. "철부지" "염치없다"는 말을 면전에서 듣고 , 남자친구 마저 현실을 바라보며 먼 길을 떠나도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미소만의 '행복'을 누가 값어치 없다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2시간의 러닝타임을 살아가는 미소의 삶은 결코 쉽지 않다. 오히려 고단한 쪽에 가깝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혀 신파적 분위기를 풍기지 않는다.초반에 언급했듯, 관객에게 주는 느낌이 깔끔하고 정갈한 데가 있다. 나는 이러한 이유가 '남들과 다른' 미소의 성격과 가치관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한솔과 시간을 보내고 일과 후 위스키 한잔을 마시는 미소는 정말 행복했을 테다. 이곳저곳 거처를 옮기며 겪는 불편함과 마냥 희극적이지 않은 에피소드 속에서도.
<소공녀>에 부제를 붙일 수 있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미소의 여행'이라고 칭하고 싶다. 다녀가는 곳마다 따뜻한 온기를 남겨놓았고 자신 1인분의 몫을 해내기 위해 노력한 미소. 밴드부 멤버들과 만나며 때론 그들을 위로하고 때론 언성을 높이며, 멤버들의 삶을 여과없이 드러낸 미소는 분명 여행 중인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평범한 나라'를 여행하는 '이상한 앨리스' 같았다.
미소는 화류계에서 일하는 자신의 '고용주'마저 비난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그 여성을 손가락질하고 욕할 때, 미소는 그를 안아주며 따뜻한 밥을 해주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따뜻한 데가 있다.
눈은 차갑지만 포근하다. 내겐 영화 <소공녀>와 미소가 그랬다. 객관적인 현실 자체는 무겁고 축축하지만, 미소의 삶을 2시간 동안 살아본 나는 포근함을 느꼈다. 한국에 이런 독립영화가 더 많이 나올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