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아야만 하는 사랑은 허상이다
더 랍스터(The Lobster)
2015 개봉 20.1.27. 왓챠플레이 관람
같아야 사는 세상, 우스운 획일화가 낳은 기괴한 불협화음.
이렇게 감동적이지 않은 사랑은 처음이야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상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가치관에 따라 제각각일 것이다. 혹자는 동성애를, 혹자는 이종(異種)과의 사랑을 들 수도 있겠다. 영화 <The Shape of water>의 주인공, 해양 괴생명체와 사랑에 빠진 엘라이자를 이상하다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대답은 조금 다르다. <더 랍스터>의 도시가 ‘요구하는’ 사랑이 가장 이상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선택지만 주어지는 사회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획일화의 폭력성이다. 호텔을 배경으로 구현되는 ‘짝을 이뤄야만 하는’ 사회든, ‘솔로여야만 하는’ 숲이든 폭력적인 건 마찬가지다.
먼저 호텔부터 살펴보자. 호텔은 구성원에게 하나의 지향점을 강요하며 붕어빵 찍어내듯 ‘완성품’을 찍어낸다. 호텔의 여성들이 모두 같은 원피스을 입고, 남성들 또한 동일한 슈트를 입은 그림은 획일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제한 시간 안에 파트너를 구하는 데 실패하면 동물이 된다.
제한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외톨이’들을 사냥하기도 한다. 커플은 선, 솔로는 죄악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명료한 ‘사상교육’을 위해 엽기적인 예를 드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여자가 혼자 길을 걸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가정한다.
숲은 180도 다른 획일성을 보여준다. 숲 속의 외톨이들은 혼자 무덤을 만들고, 관뚜껑을 닫는다. 다른 구성원과 사랑에 빠질 경우 처벌을 받는다. ‘레드 키스’ 가 구형되면 입술이 잘리고 말을 못하게 된다. 언뜻 보기엔 호텔로부터의 구원처 같지만, 하나의 ‘선’을 강요하며 폭력을 휘두른다는 점에선 호텔과 다르지 않다.
동일한 특징을 가져야 사랑일까?
호텔, 숲, 그리고 도시가 있다. 도시는 사랑을 찾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하지만 이 도시의 사랑도 이상하다. 동일해질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호텔은 도시로 넘어가 정착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 일부러 머리를 찧어 코피를 터지게 하는 ‘절름발이 남자’와 ,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여자’와 함께하기 위해 무자비한 사람이 되는 데이비드가 도시가 요구하는 사랑을 한 눈에 보여준다. 같아야 산다. 다르면, 다른 것을 티내면 동물이 된다. 도시에서 낙오된다.
하지만 ‘같은 척’할 때 나오는 불협화음은 피할 수 없다. 데이비드가 ‘비정한 여자’와 2인실을 쓰며 사랑을 나눌 때조차도 불협화음이 연주된다. 귀를 찢어놓을 것 같은 바이올린 선율은 어딘가 ‘삐걱대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시사한다. 선율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호텔을 탈출한 데이비드는 숲에서 ‘근시 여자’를 만난다. 암호까지 주고받으며 도시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외톨이 리더’에게 들켜버린다. ‘외톨이 리더’는 ‘근시 여자’를 병원으로 데려가 장님으로 만든다. 데이비드와의 공통점이었던 ‘근시’가 사라져버렸다.
결국 둘은 숲을 탈출해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간다. 데이비드는 종업원에게 스테이크용 나이프를 요구한다.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기 위해서다. 그래야 진정한 사랑을 ‘인정’받고 도시에 정착할 수 있다. 화장실에 들어간 그는 칼을 자신에 눈에 겨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데이비드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제는 장님이 된 ‘근시 여자’가 그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난다. 짐작컨대 그는 자신의 눈을 찌르지 못했을 것이다. 숲 속에서 겨우 찾아낸 사랑을 포기한 것이다.
데이비드와 근시 여자는 어디로 향했을까. 혼자 다니기만 해도 단속당하는 도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호텔일까, 숲속일까. 어느 쪽이든 획일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불행한 삶을 살아가리라.
현재로선 데이비드가 ‘랍스터’가 됐을 확률이 가장 높아보인다. 100년을 살며, 무수히 번식한다는 그 랍스터 말이다.
잔혹함이 유머를 만났을 때: 블랙유머
이 영화는 상당히 잔인하다. 충격적인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유혈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청소년관람불가’라는 등급에 고개를 끄덕이며 봤다. 하지만 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던 힘은 실소를 자아내는 유머였다. 잔인한 내용이 유머를 만나 희석되는 듯했다. 덕분에 중도하차하지 않고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주목할 수 있었다.
등장인물들에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것 또한 짓궂은 유머로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데이비드를 제외한 이들은 이름이 없다. 대신 각자의 특징에 따라 네이밍됐다. ‘코피를 흘리는 여자’, ‘외톨이 리더’ 같은 식으로 이름이 부여된 것이다.
‘결함’에 가까운 그 특징은 자신을 규정하는 동시에, 도시에 속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고유한 이름에서 부여돼야 하는 이들의 정체성은 고작 신체 특징으로 만들어진다. 이 특징을 매개로 사랑을 만나지만, 곧 그 특징은 결함으로 전락하고 이들은 버림받는다. 영화 초반부, 근시라는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은 데이비드처럼 말이다.
결국 ‘표면적인 동일성’을 기반으로 쌓아올려진 사랑은 금세 무너져내린다. 그 사랑은 다른 말로 ‘허상’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