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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다희 Nov 04. 2022

낭독 모임에서 얻은 의외의 발견

요즘 낭독 모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몇 달 전에 단편소설 함께 읽기 모임을 한 적이 있었는데요. 특이했던 점은 책을 미리 다 읽고 와서 책에 관해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토론 시간에 모임에 참여한 사람 한 명씩 소설 한 페이지씩 돌아가며 소리 내 읽고, 함께 다 읽고 난 후 토론을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책을 읽고 오지 않아도 되는 모임이라 별 부담도 없었고, 책을 소리 내서 남들 앞에서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초등학생 때 이후로는 거의 경험한 적 없었던 터라 남들 앞에서 음독한다는 것이 어색했어요. 천천히 읽어도 되는데 급하게 문장을 읽고 그러다가 오타를 내듯 여러 번 잘못 읽기도 하고요. 심지어 한 줄을 건너뛰고 다음 행을 읽어버리는 실수까지 했죠. 어이없는 실수와 함께 더듬더듬 읽으니 금세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처음에만 이랬어요. 내가 읽을 차례가 거듭 될수록, 내가 읽어낸 페이지가 늘어갈수록, 책을 읽는 나의 목소리 톤과 읽는 속도는 점차 안정되었고요. 대화문을 읽을 때면 상황에 맞는 연기 톤으로 소설을 읽고 있더라고요. 소설 속 인물이 가깝게 느껴졌어요. 음독의 즐거움을 발견한 것이지요. 낭독을 한다면 이와 비슷한 재미가 있겠다고 겉핥기식 이겠지만 호기심이 들더군요.  




낭독 모임을 진행해주시는 선생님은 아마추어 연극단에서 활동하시는 연극인입니다. 연극인과 직접 소통해보는 것도 처음이고, 수업 첫 시간에 연극이란 무엇인지 간략한 개념 정리부터 집어 주시니 내가 연극배우 지망생이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어요. 나는 글이든 대사든 소리 내서 읽고 싶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모임에 참여한 것뿐인데, 예상외로 진지한 수업 내용에 당황했던 거였죠. 이미 시작했는데 인제 와서 부끄러워 못하겠다고 핑계대기에는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안 해봐서 그렇지 그렇게 못할 일도 아닐 거라며 끝까지 참여해 보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낭독하는 것은 단편 희곡의 대본입니다. 현대판 연극 대본이지요. 각자 맡을 인물을 정하고 상황에 맞게 대사를 읽습니다. 내가 맡은 인물에 최대한 몰입하여 대사를 읽지만 어색합니다. 부자연스러운 억양과 톤만 입힌 텍스트를 읽는 모양새였겠지요. 대사 몇 줄을 읽고 있는데 적당한 지점에서 선생님이 커트를 외칩니다. 그러고 나서 대사를 하고 있는 인물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이 인물은 왜 이런 대사를 했을까요를 시작으로 계속 왜를 묻습니다. 괄호 안의 지문은 왜 있는지 또 묻습니다. 분명 낭독 수업인데, 내가 말하는 시간보다 선생님의 말을 듣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연기 배우려고 온 거 아닌데요? 



듣기만 하고 있는 수업이 지루해질 때쯤 누군가 내 귓가에 대고 손뼉을 친 것처럼 선생님 입 밖으로 나온 한 단어가 뇌리에 꽂힙니다.          



'자기 발견'   

 


"여러분들이 연극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발견을 하는 과정입니다. 그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감정을 어떤 목소리와 표정으로 표현할지 여러분들이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표현할지 집중해야 해요. 연극배우 하려고 여기에 오신 건 아니지만, 이 과정은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을 알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연기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옷을 잠시 입고 그 사람처럼 행동해보는 건 줄로만 알았죠. 그런데 남의 옷을 그냥 입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해석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해석하려면 먼저 이해를 해야 하고 이해하려면 나의 감정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표출했을지 객관적인 시선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의외의 답변을 들은 것처럼 낭독 경험이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라는 것을 듣고부터 대본에 있는 대사와 지문, 대사 사이에 있는 행간을 다르게 읽기 시작했어요.     


대사와 대사 사이에 있는 (사이)가 있을 때, 멈춤의 구간은 얼마나 되어야 할까? 깊은 한숨일까, 짧은 탄식일까, 혹은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정적인 걸까? 이 대사는 툭 내뱉어야 할까, 아니면 또박또박 읽는 게 좋을까를 고민하면서 대사를 읽더라고요. 그리고는 나는 왜 그렇게 표현하고 싶은 걸까를 자동적으로 묻게 되고요. 이 지점이 생경하면서 흥미로웠습니다. 흐뭇한 표정으로 대사를 치기 시작했던 이유 아마도 ‘자기 발견’이라는 단어에 일말의 기대심이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기대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희망, 꿈을 가진다가 아닐까요. 좀 뻔한 말이라 재미는 없습니다만... 


희망과 꿈을 품기 전에 나를 먼저 알아야 나의 희망, 내 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최근에 다시 깨달았습니다. 꿈을 멀리하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을 가까이 둬야 한다는 것을요. 양쪽으로 활짝 뻗은 두 팔을 깊게 포개어 내 어깨를 감쌀 줄도 알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낭독회 모임은 곧 끝이 납니다. 저의 연기력은 좀처럼 나아지지는 않고 있어요. 어색하고 민망하고 어색하고 부끄럽습니다. 무대 공포증과도 비슷한 이것도 나를 가로막는 벽인가 싶어서 한번 제대로 부숴 버리고 싶단 욕심도 있지만 ‘자기 발견’을 위해 서두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스스로를 쉽게 책망하는 습관을 거두고, 나를 좀 더 찬찬히 지켜볼 줄 아는 내가 되고 싶어요. 


자기 발견에도 순서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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