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by 다희사랑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다.

내 몸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내 입이 내 생각을 또렷하게 전달하지 못할 때,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그 눈빛 속에는 연민도 있고, 불편함도 있고, 때로는 확신도 있다. '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라는 확신.

가장 아픈 것은 그 확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나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내 머릿속은 온전하다. 생각은 빠르게 흐르고, 감정은 선명하게 느껴지고, 세상은 또렷하게 보인다. 나는 듣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느낀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몸이 따라주지 않을 뿐이다.

몸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단순히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과 나 사이에 투명한 벽이 세워지는 것과 같다. 나는 벽 너머의 세상을 선명하게 보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해한다. 하지만 내가 그 벽을 두드릴 때, 내 손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내가 소리칠 때, 내 목소리는 뜻대로 나오지 않는다.

말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더욱 고통스럽다. 머릿속에서는 문장이 완벽하게 만들어진다. 단어들이 정확한 순서로 배열되고, 감정의 뉘앙스까지 담긴 표현이 준비된다. 그러나 그것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진다. 혀가 꼬이고, 숨이 가빠지고, 소리는 왜곡된다. 내가 전하고 싶었던 것의 십분의 일도 전달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수없이 많은 것들을 놓친다. 빠르게 흘러가는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농담에 적절한 타이밍에 웃지 못하고, 누군가 나를 놀릴 때 즉각적으로 반박하지 못한다. 내가 할 말을 겨우 준비했을 때는 이미 대화의 주제가 바뀌어 있다. 그래서 나는 자주 침묵한다.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수 학급에서 나는 소수였다. 지적 장애를 가진 친구들 사이에서 뇌병변 장애를 가진 나는 다른 종류의 외로움을 경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한 공간에 있었지만, 우리의 어려움은 달랐고, 그 차이는 이해되지 않았다.

"바보."

그 말이 나에게 던져질 때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나는 바보가 아니야. 나는 네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해. 네가 나를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아. 내가 반박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입이 내 생각만큼 빠르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외침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몸과 입이라는 두꺼운 벽에 갇혀, 내 안에서만 메아리쳤다.

반박하고 싶었다. 소리치고 싶었다. 내 억울함을, 내 분노를,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입을 열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더욱 확신할 것이다. '저것 봐, 역시 바보잖아.' 그래서 나는 참았다. 참을수록 답답함은 커졌고, 그 답답함은 또 다시 말을 막았다. 악순환이었다.

몸이 자유롭지 않으니 도망칠 수도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라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운동장으로 뛰어가 분을 풀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 몸은 내가 느끼는 격렬한 감정을 표현할 방법을 주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앉아, 혹은 서 있는 채로, 모든 것을 견뎌내야 했다.

말이 자유롭지 않으니 해명할 수도 없었다. 오해가 생겨도, 누명을 써도, 내 입장을 설명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이 "무슨 일이야?"라고 물을 때, 나는 겨우 첫 단어를 꺼내고 있을 때 다른 아이가 이미 자기 버전의 이야기를 끝낸다. 그러면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천천히라도 끝까지 말하려고 하면,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로 제지당한다. 그 친절한 말 뒤에는 '네가 애쓰지 않아도 돼'라는 뜻이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사람들은 신체적 장애와 지적 장애를 혼동한다. 몸이 불편하면 머리도 불편할 것이라고, 말이 어눌하면 생각도 어눌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것은 추측이 아니라 거의 단정이 되어, 나를 대하는 태도에 스며든다. 천천히 설명해주는 목소리, 단순화된 질문들, 그리고 내 대답을 끝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조급함.

그 조급함이 가장 아팠다. 사람들은 내가 말을 시작하면 잠시 기다린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오래가지 않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눈빛에 초조함이 번진다. 발을 구르거나, 시계를 보거나, 다른 곳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 알았어, 알았어"라고 말하며 대화를 끝낸다. 때로는 내 말을 대신 끝내주기도 한다. 그들이 추측한 내용이 내가 하려던 말과 전혀 다를 때도 있지만, 나는 더 이상 정정할 기력이 없다.

더 힘든 것은 같은 처지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마저 나를 오해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특수'라는 이름 아래 묶여 있었지만, 그 안에서도 또 다른 위계와 오해가 존재했다. 나는 그들에게도 '다른' 존재였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도 자신의 어려움으로 힘든 사람들이다. 다만 슬플 뿐이다. 같은 고통을 아는 사람들끼리도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우리 모두가 각자의 섬에 갇혀 있다는 것이 슬프다.

몸의 부자유함은 나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앗아갔다. 달리는 즐거움, 춤추는 자유, 악기를 연주하는 기쁨.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을 앗아간 것은, 내가 나임을 증명할 기회였다. 내 생각을, 내 감정을, 내 존재를 세상에 보여줄 기회를 내 몸은 주지 않았다.

말의 부자유함은 나를 더욱 고립시켰다. 말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말은 관계를 맺고, 우정을 쌓고, 사랑을 전하는 다리다. 그 다리가 흔들리고 불완전할 때, 나는 수없이 많은 관계의 가능성을 놓쳤다. 친구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사람들, 고맙다고 전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모두 내 입안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더 힘들었다. 몸이 불편한 것보다, 말이 어눌한 것보다, 그로 인해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더 힘들었다. 나는 여기 있는데, 나는 모든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았다.

나는 묻고 싶다.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당신은 아는가? 말하지 못한다고 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움직임이 느리다고 해서 사고가 느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반응이 느리다고 해서 이해가 늦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이 서툴다고 해서 감정이 얕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내 몸은 불완전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완전하다. 내 말은 더디지만, 내 마음은 빠르다. 내 움직임은 제한적이지만, 내 상상은 무한하다. 나는 여기, 이 불편한 몸 안에, 온전한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들리지 않는다고 침묵인 것이 아니다. 표현되지 않는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 온전하게. 완전하게.

그리고 언젠가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몸의 자유로움이 아니라 생각의 깊이로, 말의 유창함이 아니라 마음의 진실함으로 사람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그때 비로소 나는, 우리는, 진정으로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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