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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스 Apr 21. 2024

영국으로 간 큰 아들

방목 육아



큰아이가 네 살 무렵이었다. 안방 벽에 가늘고 긴 포스트잇을 잔뜩 붙여놓고 호스 모양의 긴 장난감을 들고 제법 비장한 표정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묻자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던 아이는 자신이 소방관이라며 불을 끄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벽에 붙인 포스트잇이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처럼 보였다. 포스트잇을 불로 표현했다는 게 놀라웠다.


 아이가 초1 때였다. 어릴 때부터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어서인지 공부는 수월하게 해냈다. 학교 진도 수학은 끝냈길래 심화 수학 문제집을 내밀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초보 엄마의 과한  욕심이었지 싶다.
아이는 문제집에 손도 대기 전에 안 하겠다는 거다. 문제집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했다. 심화지만 네 실력이면 충분히 풀 수 있을 거라며 왜 하기 싫은지 물었다. 아이는  문제집의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거다. "어? 이게 무슨 말이야?" 수학문제집을 푸는데 색깔이라니 그러고 보니 알록달록 칼라풀했던 개념원리 수학과는 달리 심화 문제집은 흐린 쑥색의 거의 흑백 같은 색이었다. (출판사들이여! 왜 그러셨나요?) 엄마의 꼬임에 못 이겨 풀긴 했지만 아이의 표정은 영  마뜩잖았다.


수학 문제를 도덕으로 풀기도 했다. [구슬 7개가 있습니다. 형과 동생이 나눌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쓰세요]라는 문제에  '형과 동생이 3개씩 갖고 1개는 같이 놉니다'라고 답을 적어놓았다.  평소 세 살 터울 동생을 너무 잘 데리고 노는 마음 넉넉한 형이었기에  답을 보고 틀렸다는 말을 하기도 미안했다. 정답보다 사랑스러운 오답이었다. 

 수학을 못하지는 않았지만 예술 쪽에 재능이 있던 아이였다. 문제풀이 기계가 돼야 하는 한국입시를 치르며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다시 떠올려 봐도 안쓰럽다. 아이가 중고생 때 학원이며 과외는 보내고 싶지도 않았고 보낼 여력도 없었다. 독서와 글쓰기만 신경을 쓰고 워낙 자기 주도로 키워서인지 중등 때는 연회비 3만 원을 내고 강남인강을 (지금은 연회비 5만 원이라고 한다.) 보며 혼자 공부했다.  고등 때도 연회비 20만 원 정도의 메가스터디로 독학했다. 외롭고 힘들었을 그 시간이 많이 미안하기도 했다.

다르게 키우고 싶어 문제풀이 선행을 시키지 않았다. 그 여파로 아이가 고교 시절 고생이 심한 듯하여 속상하기도 많이 했다. 스스로 열심히 하는 편이라 괜찮은 줄 알았지만 재수를 하던 아이는 결국 번아웃이 왔다. 고 3 때 괜찮은 학교에 합격했는데도 욕심에 재수를 권했었다. 힘들어하는 아이를 보며 재수를 원했던 선택을 뼛속까지 후회했다.
다 괜찮다고 너의 존재 자체가 소중하고 네가 아무것도 안 해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농사를 지어도 되고 뭐든지 네가 원하는 걸 하라고 했다. 엄마는 직업도 운동도 너무 즐겁고 행복하니 엄마를 위해 무엇을 하려고 부담을 갖지 말라고 했다.


다행히 아이는 스스로 준비하여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 유학을 먼저 간 친구를 따라 여행을 떠난 아들은 자기도 유학을 가겠다고 했다.
유학원도 혼자 알아보고  영어 에세이도 스스로 준비했다. 23년 2월에 유학 준비를 시작해 바로 3월에  지원한 모든  대학의 합격 소식을 전해 주었다.

 4월부터는 아이엘츠(토플 같은 영어 시험)를 준비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어학원 한번 다니지 않았던 아이가 5월에 치른 첫 시험에서
입학기준 6.5를 받았다. 외국에 몇 년씩 살았던 친구도 한 번에 합격 기준을 받지는 못했다고 했다. 영화를 많이 보고 좋아하는 외국 배우들의 인터뷰나 수상 소감을 반복해서 보던 평소 취미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영화는 어려서부터 정말 많이 봤었다. 신기한 것은  영어 자막이나 무자막이 아니라 한글 자막으로 봤는데도 리스닝이 좋아졌다. 한국 입시에 지쳐 번아웃이 와서 6개월 정도 쉴 때도 매일 두세 편씩 영화를 보긴 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키울 때는 방목인지 방치인지 많이 혼란스러웠지만  아이를 향한 믿음은 내려놓지 않았다. 세상 모두 몰라줘도 엄마는 끝까지 믿고 응원해줘야 하니까.

아이들이 어릴  때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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