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nd day
From Roncesvalles
To Zubiri
두 번째 날의 일기
걷다 보면 문득, 내가 세로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맞다.
한 번도 나는 가로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다.
어쩌면 사람들은 두 생각 모두 하지 않았을지도.
아니, 확실히.
두 번째 아침이 밝았지. 단지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어. 우린 이 길이 익숙하면서도 막상 우리를 안내해 주는 조개표시가 어색하기만 했어. 어둠 속을 걷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야. 새벽어둠을 헤치고 길을 나서면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헤매었어. 참 서툴렀지. 걸음걸이조차도 그런 듯이 느껴졌어. 이 길의 마지막 아침까지도 나는 여전히 서툴었던 것 같아. 항상 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지만 무턱대고 당당했지. 그 당당함 때문에 걸을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네가 있어서 나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이 날도 무턱대고 당당하게 계단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는 반대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 배낭을 놓고 올라온 하흥이는 다시 배낭을 가지러 가야만 했어. 시작부터 힘을 뺐지만 우리는 곧 아침을 먹을 생각으로 다시 길을 나섰어. 론세스바이예스에서 나오는 처음 그 길은 어두운 풀숲이었어. 혼자 왔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으스스했지만 하흥이의 불빛이 우리의 앞을 비추었고 이 세계가 그 조그마한 불빛으로 줄어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그래서 많이 무섭지는 않았어. 우리는 그 조그마한 세계를 한 걸음 한걸음 앞으로 옮겨갔지. 그리고 머지않아 발을 조금 절뚝거리는 한 할아버지를 만났어. 아저씨는 멕시코 사람이지만 미국에 산다고 하셨어. 이번이 세 번째 순례길이라고도 덧붙이셨지. 우리는 정말 놀랐어. 다리가 불편해 보이시는데도 부지런히 잘 걸으셨거든. 아저씨의 이름은 헤수스. 헤수스는 참 다정했어. 그리고 끝내 우리는 헤수스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
아침부터 뭐가 그리도 신이 났었는지 싱글벙글 거리며 수다를 떨며 걷던 우리가 잠깐 길을 헤맬 때에도 헤수스 덕분에 다시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었지. 초반에는 누구든 열정이 넘치기 마련이잖아? 아마 사진도 이때 가장 많이 찍었던 것 같아. 그 뒤로는 사진이고 나발이고 모든 것은 가슴에 새기자 외쳤지.
이렇게 신나게 걷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헤수스가 우리를 불러 세웠어. 그는 우리를 향해 손짓하며 그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지. 맞아, 우리는 수다에 정신이 팔려서 표식을 보지 못했어. 하마터면 길고 긴 길을 걷고 난 후에야 깨달을 뻔했지 뭐야. 이때뿐 아니라 이 날은 헤수스 덕분에 길을 몇 번이나 다시 찾았는지 몰라.
그래서 하흥이와 나는 이 길이 맞나 싶을 때 갑자기 허공에 대고 그의 이름을 불렀어. 그럼 이내 대답이 돌아와 길을 찾을 수 있었지. 느리지만 꾸준히 걷는 그를 보면서 참 멋지다고 생각했어. 가장 먼저 출발해서 거의 쉬지 않고 걸어 숙소에 도착하는 헤수스를 보면서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다시금 마음속에 새길 수 있었지. 아침마다 길을 걸으며 헤수스를 만날 때 정말 반갑더라. 가끔은 생각해. 왠지 헤수스는 아직도 그 길을 걷고 있을 것 같다고. 그리고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면 아침 찬바람과 함께 헤수스가 나타나 나에게 길을 알려 줄 것 같다고. 그는 항상 그렇게 내 곁을 걷고 계실 것 같거든.
그의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걷다 보니 날이 밝았어. 아침 먹을 시간이 되었음을 직감했지. 하흥이와 나는 항상 아침을 길 위에서 먹었지. 뭔가 낭만이 있다고 해야 할까? 매일을 떠오르는 해와 함께 말이야. 이 날 아침은 밥이었어. 사실 쾰른 이모댁에 있을 때 피아노씨가 놓고 간 비상식량이었지. 한국의 비상식량은 역시 대단해. 아침을 밥으로 시작하니 정말 든든했어. 평소 같았으면 몇 번이고 먹었을 아침이지만 이 날은 그렇지 않았어. 한국인은 밥심.
여전히 길은 산길이었어. 걷다가 조를 만났지. 하흥이는 조를 보면서 참 곱게 생겼다고 했어. 그래서 말을 걸고 싶다고 했지.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조의 옆을 걷고 있었고, 하흥이는 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 나는 그저 말없이 그 둘을 걸었고 말이야. 나는 걸을 때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 너도 알겠지만, 가끔은 아니 사실 대부분은 생각 속에 빠져있는 편이지. 무언가에 빠진다는 것은 현재를 잊게 만들곤 이내 나를 다시 현재로 데려다 주지. 나는 과거를 떠올렸고, 현재를 살며 미래를 걱정했어. 아니 난 미래를 떠올렸고, 과거를 살며 현재를 걱정했지.
나는 산을 좋아해. 내리막 길도 좋고, 오르막 길도 좋아하지. 단지 난 평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뿐이야. 빠른 나의 걸음을 따라 그들은 참 잘도 내려와 주었어. 그리고 하흥이는 다리가 아프다고 이야기했어. 이때부터 하흥이와 나는 조금씩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걷고 난 뒤 시원하게 씻을 때의 느낌. 그리고 잠깐 낮잠을 청했어. 하흥이는 세움이와 와이파이를 찾아 어디론가 떠났지. 그리곤 까르르 웃으며 돌아왔어. 우리가 묵었던 알베르게 앞마당에서 므라찌와 수정언니, 싱가포르 아저씨를 만나 시간을 보냈어.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모두가 나른해지는 오후였지. 싱가포르에서 온 아저씨는 정말 재미있는 분이시더라. 저번엔 이날 찍었다며 페이스북으로 사진을 보내주셨는데 차마 보여주진 못하겠어. 왜냐하면 모두가 눈을 감고 있었거든. 하지만 잘 간직할게. 그마저도 이젠 소중한 추억이 되었으니까.
땀을 식히며 마시는 맥주 한 캔. 사실 한 캔으로 끝나지 않아서 문제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더 마셔둘 걸 하는 생각도 들어. 우리가 이곳 알베르게에서 침대에 묵었다는 사실을 말하면 모두가 놀라곤 했지. 그 적은 수의 침대를 어떻게 선점할 수 있었는지 말이야. 그중에서도 우린 빨리 도착한 편이었어. 침대를 고를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나는 숙소 때문에 걱정했던 적은 없는 것 같아. 우리의 걱정은 항상 저녁 메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지. 참 행복하게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