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이 더 기억에 남으니까
2월의 필리핀, 시아르가오 섬은 우기이다. 그렇다고 매일같이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저곳 섬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비를 맞기도 하고, 잠시 어딘가 처마 아래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섬에 다녀오던 길.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고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즐거웠다. 왜인지 모르게 더 기억에 남기고 싶어서 눈을 오랫동안 감지 않았던 것도 같다.
얼마 달리지 않아 내리는 빗살이 따스한 햇살이 되었고, 숙소에 도착하니 이내 하늘이 맑게 개었다. 마치 우리가 도착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비가 내리는 어두운 날에 빗방울 냄새가 가져올 추억이 하나 더 늘었다.
서핑을 하고 온 다음날이었던가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항상 함께 밥을 먹는 독일 친구가 다른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핑계 삼아 나는 저녁 일찍 침대에 누웠다. 누워서 뒹굴거리려는 계획이었지만 이내 잠이 들었고,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가끔은 푹 쉬어줘야 하는 나의 몸. 시원하게 비가 내린 뒤에 맑게 개인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독일친구와 함께 카페에 갔다. 우리의 모닝루틴. 처음 간 카페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나는 그림을 그렸고, 그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었다.
이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글보다 그림으로 순간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그렇게 나는 매일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모든 순간을 기억 속에 붙잡아두려 했지만, 그는 말했다.
오늘이 시작일 수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