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엔 더 맛있게 해 줄게
그 자리, 그대로인 엄마의 마음 그리고 잡채
중학생 때까지는 온 가족과 한 집에서 아웅다웅하며 살았다. 나와 동생은 항상 방을 같이 써야 했고, 거실도 따로 없는 집엔 안방과 언니 방, 그리고 우리 방, 이렇게 방 3개가 주르르 붙어있었다. 그러다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가게 됐고, 그 후론 지금까지 쭉 가족과 따로 지내고 있다.
집에 내려가는 일은 고등학생 땐 주에 한 번이었던 것이, 대학생 땐 달에 한 번이 됐고, 그 횟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러나 나를 맞이하는 엄마의 물음은 한결같았다.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내 대답 또한 그랬다.
"그냥 뭐, 잡채?"
왜인지 어렸을 때부터 잡채가 그렇게 좋았다. (옛날 사진을 찾아보니, 잡채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내 생일상에 올랐다.) 물론 엄마가 해 준 음식이야 큼직한 고기와 송송 썬 두부가 가득한 김치찌개부터, 적당히 물을 먹어 쫀득한 쥐포를 매콤 달콤한 양념으로 볶아낸 쥐포 고추장볶음, 세숫대야만 한 볼에서 한 국자 꺼내 굽던 해물 파전까지 하나하나 다 놓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대답은 항상 잡채였다. 여러 재료들이 한 데 모여 내는 조화로운 맛은, 밥을 잘 안 먹는 나도 가득 채운 밥 한 공기를 순식간에 비우게 하기 충분했다.
얼마간 똑같은 문답이 반복되자, 엄마의 질문이 조금 달라졌다.
"잡채는 해놨고, 또 먹고 싶은 거 있어?"
내 대답도 따라갔다.
"그럼 갈비? 김치전도 먹고 싶고~"
저절로 올라간 입꼬리를 붙잡고 한껏 응석을 부리며, 먹고 싶은 걸 잔뜩 얘기했다.
집에 내려가면 엄마는 오일장에 갔다 양손 가득 검은 봉지를 들고 나타나선, 그 안에 담아온 신선한 재료들로 가장 먼저 잡채를 만들어줬다. 식탁에 올리기 버거울 정도로 큰 전기팬에 오색빛깔의 재료들을 잔뜩 넣고 볶은 후, 당면을 넣고 간장과 올리고당에 또 볶았다. 이윽고 투명했던 당면이 먹음직스러운 갈색으로 변하면, 불을 끄고 접시에 예쁘게 담은 후 깨를 듬뿍 뿌려 내줬다. 따뜻한 당면은 잘게 썰린 파와 함께 후루룩~ 입 안으로 들어와 달콤한 맛을 냈다.
하지만 일단 밥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잡채는 빠르게 생기를 잃어갔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가서도 길어야 3-4일, 보통은 하루 이틀이면 다시 서울로 올라와 버린 탓이다. 이럴 때야 보는 고향 친구들도 만나고, 저녁엔 고기도 굽고 하다 보면, 잡채는 많아야 두 번, 적게는 겨우 한 번 식탁에서 빛을 발했다. 나만큼 잡채를 좋아하진 않는 동생과 입 짧은 아빠 덕에, 주인을 잃은 잡채는 밀폐 용기에 담겨 차가운 냉장고로 보내졌다. 그리곤 가끔 버리기 아까워 드는 엄마의 젓가락에 몇 번 밖으로 나왔다가, 곧 버려졌다.
요즘은 부모님 생신이나 설, 추석 등 손에 꼽는 날에만 기차에 오른다. 집에 내려간다는 소식을 전해도 엄마는 그저
"먹고 싶은 거 있어? 시켜줄게~"
라고 묻는다. 나 혼자 엄마가 차려준 잡채, 갈비찜, 굴비 등을 다 먹을 순 없다는 걸 아신 거다. 엄마의 수고도 덜고, 음식을 버릴 일도 없어 그게 맞는 줄 알면서도, 한편으론 엄마가 더 이상 나를 위한 요리를 하지 않는단 생각에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 내려가는 길, 별안간 엄마에게 잡채를 만들어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주 조금만 말이다. 잡채는 물론이요, 다른 음식들도 술술 읊었던 때와 달리, 내 마음은 물어볼까 말까 몇 번을 주저하다 용기를 냈다. 하지만 엄마의 마음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그럼~ 순대볶음도 해줄까?"
그렇게 둘째 딸을 위해 매번 잡채를 만들던 몇 년 전의 일이 엊그제인 듯,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잡채와 순대볶음을 뚝딱 만들어 주셨다. 잘 볶아져 탱글탱글한 당면을 한 젓가락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엄마, 잡채는 어떻게 만들어?" 엄마는 "왜? 잡채 만들게?"라며, 순식간에 레시피를 읊어대기 시작했다. '먼저 당면을 물에 불린 다음에...' 그러다 그걸 받아 적는 나를 발견하곤 "그러지 말고 인터넷에 찾아봐. 다 나와~"라고 하셨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엄마의 방법'이 궁금해서~
엄마는 내 대답에 씩-웃으시곤, 다시 천천히 설명을 이어갔다.
울 엄마표 잡채 레시피
1. 정수기로 뜨거운 물을 받은 후 찬물을 섞어, 따뜻한 물에 30분 정도 당면을 불린다.
엄마 : 빨리 하려고 그러는 거지.
2. 계란 흰자와 노른자를 잘 섞어 얇게 부친 후 식힌다.
3. 맛살과 어묵을 길게 썰어놓는다.
엄마 : 네가 좋아하는 거.
4. 잡채용 고기를 볶는다.
나 : 무슨 고기로 해?
엄마 : 잡채 한다고 하면 알아서 줘.
5. 4에 다진 마늘, 후추, 소금을 넣고 섞으며, 기름에 볶는다.
엄마 : 맛살이랑 어묵은 따로 간을 할 필요가 없어.
6. 2에서 식힌 계란을 길게 썬다.
7. 기름에 당면을 볶다 간장과 올리고당을 넣어 간을 맞춘 후, 모든 재료를 넣어 다 같이 볶는다.
8. 시금치나 부추, 버섯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걸 넣어도 된다.
엄마 : 근데 우리 집은 지민이(동생)가 시금치를 안 좋아하니까 안 넣지.
9. 하지만 이것저것 넣다 보면 양이 금방 늘어나니 주의할 것!
엄마의 사랑, 아니 잡채를 먹으며 1박 2일을 보낸 후, 다시 혼자인 집으로 돌아왔다. 잘 도착했다고 카톡을 보내니 한참 있다 엄마의 답장이 도착했다.
"추석에는 잡채 더 맛있게 해 줄게.
다른 것도 먹고 싶으면 얘기하고~"
이번에도 만든 것에 비해 얼마 안 먹고 올라가버린 게 신경 쓰이셨던 모양이다. 배가 불러서 그런 건데, 맛이 없어서 그런가-했을 엄마에게 미안했다. 그대로인 엄마의 마음을, 변한 내 마음으로 쳐다보고 서운해했던 게 부끄러웠다.
엄마, 추석 땐 위대(胃大)한 사람이 돼서 내려갈게요.
잡채랑 갈비랑 전이랑 다 해줘요. 다~ 먹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