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여름, 이효리는 3집 앨범 <It's hyorish>를 낸다. 본인의 이름을 딴 앨범명처럼, 가수이자그냥 사람으로서의 스스로에 대한 목소리를 내 좋은 평을 얻었다.그리고 유독 사람 냄새가 났던 그 앨범에서 내 눈에 띄었던 건 타이틀 곡<U go girl>이 아닌, <이발소집 딸>이었다.
저기 멀리 나를 보는
화려한 차림 속에 웃는 내 얼굴
때론 나조차 그 모습에
익숙해져 잊고 살진 않았을까
지금이 내가 되기 전에 걸어왔던
수많은 시간들
나는 여전히 너의 친구야
시간이 가도 난 그대로
나는 여전히 이발소 딸이야
시간이 가도 난 그대로 - <이발소 집 딸> 가사 중 -
예전에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녀가 아버지가 운영하던 이발소를 찾아간 걸 봤다. 지금도 (당시의 이효리를 기억하고 있는) 이웃 아저씨가 그곳에서 똑같이 이발소를 하고 있었는데, 옛날엔그 가게가 반으로 나뉘어 한편엔 여섯 식구의 방이 있었다고 했다.
방송에 비친 가게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는데, 그 반만 한 공간에서 겨우 두 다리를 뻗고 잘 정도였다고 하니, 연예인 이효리와는 잘 매치가 안 되는 과거였다. 그러면서 한 일화를 소개했는데, 청소를 하거나 면도 거품을 내는 등 아빠 일을 도와주다가도, 같은 학교 남자아이들이 이발소에 오면 창피해서 숨어버렸단 얘기였다.
그때 그 이야기가 너무도 와 닿았다.
나도 그랬으니까.
가게를 지나 들어가야 했던 작은 집에서, 34평 아파트까지
엄마와 아빠가 자전거 가게를 하다 보니, 사람들은 우리를 자전차포 딸이라고 불렀다. 자전거를 잘 못 일컫는 말인 자전차에 가게 포(舖)를 붙인 건데, 시골이라 그랬는지, 아님 고작 자전거라 그랬는지 사람들은 자전거 가게를 자전차포라고 했다. 반지하인 듯 지반이 살짝 내려앉은 가게로 들어가 반대편 문을 열면,바로 거실도 없이 방만 달랑 2개인 우리 집이 나왔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올 땐 무조건 가게를 지나쳐야 했는데, 그때마다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두려워 눈치를 봤다.밖에서 슬쩍 안을 들여다보다 아무도 없거나, 내가 모르는 어른들만 있으면 그때 얼른 가게로 들어갔다.그리곤 고장 난 자전거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아빠 앞을, 모기 소리만 하게 "다녀왔습니다~"란 말만 남기고 지나쳤다.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우리 집은 이사를 했다. 원래 동네에서 제일 큰 마트였던 곳이 새로 생긴 더 큰 마트에 밀려 나간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예전에 마트였던 탓인지 화장실을 가려면 밖으로 나가야 했지만, 방도 하나 더 많아지고 가게도 넓어져 우리 집 형편이 좀 나아지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시내에 있는 대형 쇼핑몰에 입점을 해, 매장 2개를 같이 운영하느라 바빠질 무렵이었다. 아빠는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자전거 배달을 가는 길에 조그만 트럭 안에서 식사를 해결하셨다. 단시간에 에너지를 얻기 위해 초코파이나 양갱 같은 고열량의 음식을 자주 드셨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한동안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양갱인 줄 알았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가 땀 흘려 모은 돈으로, 이번엔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됐다. 동네에 새로 생긴 가장 비싼 아파트이자, 우리 가족의 첫 아파트였다. 방은 여전히 3개였지만, 처음으로 집에 거실과 베란다가 생겼고, 동생과 내 방엔 새 책상과 침대가 두 개씩 나란히 놓였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하굣길에 가게를 지나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게 가장 좋았다.
언제나 우리의 발이 되어준 트럭, 그런 널 창피해해서 미안해
얼마 안 있어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됐는데, 기숙학교라 평일엔 발이 묶여,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부모님들이 차에 실어 갖다 주시곤 했다. 나도 종종 엄마에게 생필품이나 간식 등을 부탁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트럭을 타고 오는 아빠를'외부차는 학교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이유로 정문 밖에서만 맞이했다.
사실 다른 부모님들은 괜찮다며 대부분 차를 학교 안까지 끌고들어왔지만, 트럭을 타고 오는 집은 우리 집을 포함해 전교에 딱 두 집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애 살던 아파트 주차장에서도, 아빠의 파란색 트럭은 단연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 아파트도 다시 없어지려 하고 있었다. 입점했던 시내의 쇼핑몰이 부도를 맞은 것이다. 부모님을 비롯해 많은 가게 주인들은 대금을 돌려받지도 못하고 하릴없이 쇼핑몰에서 나와야 했다. 당시 그 일로 억대 빚을 지게 됐는데, 아빠는 우리에게 티를 내지 않으셨다. 다만 늦은 밤 소주 한잔에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셨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얘기다.)
여러 해가 지나 부모님은 결국 모든 빚을 갚으셨고, 아파트를 판 비용을 보태 근처에 땅을 사서 이층 건물을 지었다. 이번엔 1층이 가게, 2층이 집이었다. 가게 뒤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기 위해, 집에 갈 때면 다시 가게를 지나야 했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대학생이 되어 이젠 서울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다 자란 내 키만큼 이미 마음도 자라 있었다.
그곳에서 가게는 온라인으로 진출하며,대형 쇼핑몰에 입점했을 때보다도 더 잘 나가기 시작했다. 가게 한 구석엔 컴퓨터가 한 대씩 놓인 엄마와 아빠의 책상이 놓였고, 여름이면 모자라는 일손을 채우기 위해 직원을 2-3명씩 더 뽑아 엄마와 아빠까지 7명이 넘는 사람이 가게에서 일하곤 했다. 아빠의 책상 뒤엔 전국 판매량 2위라고 쓰인 상패들도 하나, 둘 걸리기 시작했다.(가끔 1등도 하셨지만 2등인 적이 더 많긴 했다.)
하지만 가게에서 일을 할 때도 가족끼리 놀러 갈 때도, 우리는 여전히 한 대 뿐인 트럭을 타고 다녔다.
그냥 자전차포가 아니라, 꽤 유명한 자전거 가게라고요. 에헴.
그래도 자전차포는 자전차포였을까.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와, 혹시나 하는 맘에 늦은 시간까지 가게를 지키고 있는 아빠 옆에 앉아이런저런 얘길 하고 있었다. 얼굴이 벌건 남자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가게에 들어오더니, 진열된 자전거들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이건 얼마예요?","저건요?"라고 묻기 시작했다. 살 생각이야 당연히 없고,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으로 괜한 화풀이를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빠는 그 남자의 시비조 물음에도, 일반 손님을 대하듯 성의껏 대답하셨다. 취한 사람을 건드려봐야 좋을 게없다는 걸 알기에 그러셨으리란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그간 가게를 십 년 넘게 운영하며그와 비슷한 일들이 이미 수없이 일어났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 남자는 그러다 곧 나갔지만,수년이 넘은 지금도 그 사건은 내 기억 한편에 남아있다. 아빠도 그럴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린다.
그 사이에 가게는 더 세를 확장했고, 우리 셋은 모두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다. 부모님과 동생은 여전히 그때 그 2층 집에 살고 있지만, 1층은 가게가 아닌 창고로 쓰이고 있다. 부모님은 기차역 근처에 또 땅을 사서 전보다 훨씬 큰 2층짜리 매장을 만들었고, 전국에서 가장 큰 자전거 가게의 사장님이 됐다.
아빠가 보내줬던 사진
아빠는 건물이 완성되기 전부터 가게 조감도를 문자로 보내고,전화를 걸어 자재들을 직접 골랐으며, 광주에서 처음이라는 최신형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단 얘기를 자랑스레 들려주시곤 했다. 몇 달 후 건물이 완성되고 나선한동안은 광주에 내려가면 바로 집에 가지 못하고,옛날처럼 가게를 먼저 들러야 했다. 조금씩 다듬어지고 있는 아빠의 궁전 같은 가게를 구경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자 친구가 아이들(고양이들)을 데려다준다고 같이 광주에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아빠는 그때도 첫 만남에 바로 그를 가게로 데려가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셨다.
그 후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나고 다시 가게로 돌아올 일이 있어, 친구와 그녀의 남자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온 적이 있었다. 저 멀리 가게가 보이기 시작하자 친구의 남자 친구가 '아~ 여기!'라며 아는 체를 했고, 친구는 옆에서 '이 가게가 얘네 거야~'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어깨가으쓱했다.
이제 나이가 서른을 넘어 더 이상 부모님의 직업이 나를 설명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지만, 동네 어르신들은 아직도 나를 자전거 집 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부모님이 자전거 가게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곧잘 묻는다.
그럼 자전거 잘 타겠네?
글쎄, 자전거는 그냥 다른 사람들이 타는 정도로 타고, 그마저도 자전거가 없어 자주 타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