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대신 적는 아빠의 이야기
곧 다가올 어버이날을 맞아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갔다. 지난 구정 이후로 3개월여 만에 찾아간 집은 여전했지만, 아빠의 모습은 3년이 지난 듯 달라져 있었다.
어느 날부터 얼굴에 올라온 깊은 주름은 더 늘어있었고, 또래보다 적다고 자부하던 뱃살은 눈에 띌 정도가 되어 있었다. 시간이 참 빠르단 말을 제법 자주 할 동안, 아빠의 시간은 나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달려온 것 같았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는 스테인리스 수저와 젓가락을 만드는 공장을 차렸고, 고모들은 덕분에 부유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고, 아빠는 그 혜택을 얼마 보지 못하고 어렸을 때부터 가난을 온몸으로 이겨내야 했다.
어디선가 들어볼 법한 이야기다. 잘 나가던 사업이 망해 가세가 기울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말은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의 자수성가로 해피엔딩으로 끝나곤 한다.
지금은 다들 장성한 자식들과 조카에 호의호식하며 잘 살고 있으니 우리의 이야기도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봐온 아빠의 두터운 손엔 해피엔딩 속에 감춰진 자잘한 새드엔딩들이 굳은살로 하나하나 새겨져 있었다.
요즘은 잘 볼 수 없는 엿장수부터 구두닦이까지, 아빠는 코 흘리게 시절부터 일을 해야 했다. 일을 마치면 방앗간에서 없는 애완조를 들먹이며 상품가치가 없는 자잘한 '조'를 얻어와 밥을 해 먹었다. 영화 <새 모이를 먹는 소년>의 소년이었다.
집에서 먹는 밥은 물론이고 학교에 싸간 도시락도 마찬가지였다. 쌀은 얼마 없고 조로 밥을 지으니, 놋쇠 뚜껑을 열면 누리끼리한 떡 같은 것이 고춧가루도 몇 개 묻지 않은 허여 멀 건한 깍두기와 뉘어있었다. 왁자지껄 떠들며 서로의 반찬을 뺏어먹는 와중 누구도 손을 대지 않는 안전지대였다.
그래서 아빠는 지금도 몸에 좋다는 잡곡밥보다 그저 하얗고 또 하얀, 잡곡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흰쌀밥을 좋아하신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공부하고 책 읽는 걸 좋아하던 아빠는 가끔 책이 방 안에 가득 놓여있는 꿈을 꿨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얼른 그 책들을 읽어야겠단 마음으로 눈을 뜨면 텅 빈 방뿐이었던 아침들. 그때 아빠는 <달콤한 인생>의 제자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생각하며 속으로 울었다.
사업 실패 후 술에 빠진 할아버지를 대신하느라 연필 대신 연장을 들어야 했던 아빠. 그런 아빠를 생각하며 멀리 차창밖을 바라보니 스치는 푸른 나무들이 순간 흐릿해진다.
아직 놓지 못한 펜치를 대신 받아드리고, 그 손에 니체의 책을 쥐어드리고 싶다.
*. 표지 사진 : Liane Matz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