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즈번에서 미술관 가는 길

브리즈번에서 타우포까지 #4

by Dahl

*. 본 글은 <브리즈번에서 타우포까지> 시리즈로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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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이미 작품

브리즈번에서의 둘째 날이 밝았다. 에서 제일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도 거리가 꽤 돼서, 일이 있어 일찍 나간 오빠를 대신해 새언니가 차로 데려다줘야 했다. 아침에 오빠가 현금이 없는 내 사정을 알고 버스비로 쓰라며 탈탈 털어 준 동전 손에 쥐고 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브리즈번의 흔한 버스 정류장
버스 정류장 건너편 풍경

근데 이래도 되는 건가. 그냥 버스를 타러 정류장에 나왔을 뿐인데, 하늘이 맑아도 너무 맑았다. 차도, 사람도 없는 도로 위로 다양한 '하늘'색이 자연스럽게 그라데이션을 이루고 있었, 구름은 치 짠 듯 일정한 무늬로 하늘을 덮으며 아름다운 경에 일조하고 있었다. 오늘은 미술관을 가려고 했는데, 가기도 전에 이미 작품 하나를 감상한 것 같았다. 그렇게 지루할 틈 없이 버스를 기다리다, 외워둔 번호의 버스를 타고 브리즈번 시내로 갔다.


가장 먼저 유심을 사 끼워야 했다. 미술관을 찾아가려면 인터넷이 돼야 했으니까. 젯밤 빠가 그려준 약도가 있었지만 결국 같은 곳을 3번쯤 지나친 후에야 optus에 도착했고, 고민하다 30달러짜리 유심을 샀다. 12기가(20달러)와 50기가(30달러) 사이의 저렴한 유심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일부러 중간 상품은 만들지 않은 것 같았다. 12기가는 좀 적고 50기가는 좀 많지만, 모자란 것보단 넉넉한 게 나으니 다들 30달러짜리 유심을 사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갔던 Optus 매장

아날로그 방식으로 손으로 그린 지도를 보고 걷다, 무려 50기가 바이트만큼의 인터넷을 쓸 수 있게 되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핸드폰과 구글맵만 있으면 미술관이야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러나,

먼저 카페인을 충전해야 했다.


오, 너 아티스트야?


8월의 브리즈번은 겨울이었지만, 그렇게 춥진 않았다. 엔 꽤 따뜻해 긴팔 니트 한 장만 걸치고도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선지 봄을 맞이하려는 듯 여기저기에서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즉석에서 음식을 만들어 파는 푸드 트럭이 군데군데 자리했고, 잼을 만들어 시식행사를 하거나 와인과 맥주를 잔에 따라 파는 곳도 있었다.


카페 DENIM CO
고프로, 선글라스, 그리고 아이스 라떼

슬쩍 인파에 끼어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찾던 카페가 나왔다. 흰색 베이스의 인테리어에 상큼한 민트색으로 포인트를 준 가게였는데, 안에는 자리가 없고 차양 아래에 역시 흰색의 테이블과 민트색의 의자들이 놓여있었. 사시사철 날씨가 좋은 브리즈번이기에 가능한 일이 리라. 구경하며 가느라 좀 걸었더니 더워서 호기롭게 아이스 라테를 시켰다.


커피가 나오기 전 하릴없이 자리에 앉아있다 핸드폰을 들었다. 혼자 여행을 와 카페에 앉아있다니, 그렇다면...

셀카를 찍어야지!


찍어줄 사람이 없으니 이 순간을 스스로 기록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구석에 앉아 조심스레 사진을 찍고 있는데, 자기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유리 너머로 반대편 카페의 종업원이 나를 보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흔들고 있었다. 그러곤 자기도 같이 찍자는 뭐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은데, 당황해서 어버버-하다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같이 찍을 걸...


그때 찍고있던 셀카

잠깐 후회했지만 곧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내, 언니에게 부탁받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부터 시작했으나 퇴사와 여행 준비로 바빠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호주까지 들고 오게 된 그림이었다. 이제라도 얼른 완성하자 싶어 부랴부랴 펜을 놀리고 있는데, 옆에 앉은 남자가 말을 걸었다. 잠깐 화장실에 가려고 하는데, 자기 노트북 좀 봐달라는 거였다. 아, 한국에서나 다들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니지, 외국에선 절대 그러면 안된다더니. 정말이구나!


언니 친구의 반려견 별이

그에게 "Sure(물론)"라고 답한 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얼마 후 돌아온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내 아이패드를 흘깃 보더니, "오, 너 아티스트야?"라고 물었다. 난 쑥스러워하며 그냥 취미로 그리는 거라고 답했는데, 그는 내 수줍은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덧붙였다.

Oh, so cool.
(오, 너 진짜 쿨하다!)





이제 알게 된 지 겨우 이틀째가 된 브리즈번이라, 짐짓 아닌 척했지만 실은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앞길을 밝혀준 30달러짜리 유심칩과 유쾌했던 카페 종업원, 그리고 나를 쿨녀로 만들어준 그 덕분에 잔뜩 뭉쳐있던 어깨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이제 진짜 미술관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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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에 게시된 사진은 모두 제가 직접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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