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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hl Jun 05. 2020

집순이가 집을 나가면 생기는 일

= 프러포즈

보통은 결혼식 날짜까지 잡아놓고 하는 서프라이즈 이벤트의 일종인 프러포즈. 그래도 그렇지, 날짜야 물론이고 이미 집까지 구해 같이 사는 마당에 감감무소식인 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결혼(식) 준비를 시작한 지 어언 8개월, 그는 도통 프러포즈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필이면 그즈음,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꼭 사랑 이야기가 나왔고(무의식이 나를 이끌었는지도?)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그에게 눈을 흘기며 "아, 저 여자는 진짜 좋겠다~"라고 볼멘소리를 했고, 그는 "에이~ 잊어버리고 있어. 애기가 잊어버릴 즈음에 할 거야."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렇게 결혼식 D-31이 다가왔다. 코로나 사태로 재택근무를 한 지 2개월이 넘었지만 태생이 집순이인지라 답답한 줄 모르고 하루 종일 집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 외출이라곤 결혼 준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이런저런 샵을 갔다 곧장 집으로 오는 정도였다.


그러다 몇 달 만에 홀로 집을 나설 일이 생겼다. 미리 봉투에 넣고 스티커로 봉인해둔 청첩장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본 친구들은 여전한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고 우리는 밀린 근황과 관심사를 나누며 점심과 저녁을 함께 했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찬가지로 친구를 만나러 갔던 그에게 연락을 했다 좀 더 걸릴 것 같다는 답장을 확인하며 홀로 언덕을 올랐다. 요즘 줄곧 같이 있었던 탓인지 살짝 쓸쓸했지만 곧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고양이들 생각에 힘이 났다. 얼른 가서 애기들 간식 챙겨줘야지~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멈춰있어 금방 집으로 올라가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불이 다 꺼져있었다. 평소엔 집을 나갈 때도 아이들 때문에 조명을 한두 개는 꼭 켜 두는데 그가 깜빡하고 불을 다 끄고 나간 것 같았다. '아이 참, 이따 오면 한 마디 해야겠네.'라고 생각하며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는데, 익숙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바닥에 빨간 장미꽃잎들이 흩어져 있고 그 위로 작은 초들이 두줄로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엔 까만 정장을 차려입고 커다란 꽃다발을 든 그가 서 있었다. 순간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이 믿기지 않아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프러포즈인데 막상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자 이것저것 자잘한 준비를 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나 프러포즈받고 있는 거 맞구나! 정신을 차리고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보고 있자니 다소 긴장한 듯 딱딱한 표정 위로 떨리듯 씰룩거리는 입이 보였다. 어쩔 줄 모르고 얼어있는 그에게 다가가 꽃다발을 건네받고 그의 질문에 바로 답했다.


"애기야, 나랑 결혼해줄래?"

"응!!"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정사각형의 상자를 꺼내 열어 보였다. 금색 목걸이의 삼각 펜던트 한가운데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목걸이를 걸어주는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있자니 울컥하며 눈물이 한 줄기로 똑 떨어져 내렸다.



우리가 진짜 결혼식이란  하는구나, 실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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