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hl Aug 19. 2020

나는 노예와 결혼했다

부재 : 그가 만성피로를 겪는 이유

원래 그의 애칭은 애기(a.k.a. 애기 사자)가 아니었다. 예노였다. 


이제 막 서로를 알아가려는 즈음, 여느 썸 타는 남녀처럼 카톡으로 실없는 대화를 나누다 그에게 핑- 스매싱을 날렸다. "평생 옆에 있어줄 거야?" 무슨 생각이었을까. 내가 왜 그랬지, 후회하던 찰나 메신저에서 1이 사라졌다. "당연하지!" 퐁- 그가 백핸드로 나의 스매싱을 받아냈다. 그런 그에게 "노예와 주인 사이로 평생 가는 걸 말한 건데~?"라고 농을 던진 게 시작이었다.


후에 들어보니 날 놓치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뒷일은 미뤄두고) 예스맨이 됐던 거라고 한다. 허나 이를 어쩌나, 그가 반한 여자는 생각보다 꽤 장난스러운 사람인 걸.


반신반의했던 그의 예상과 달리 나는 진짜로 그를 '노예'라고 불렀다. '엎고 계단 오르기' 같은 무리한 요구를 해놓고 안 해주면 "뭐야, 내 노예라면서!"라고 꼬장을 부리는 식이었다. 진짜로 해주길 바란 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때마다 지금보다 더 순했던 당시의 그는 "조용히 얘기해야지, 사람들이 듣잖아."라고 소심하게 의견을 내더니 어느 날엔가는 협상을 시도했다. "노예 말고 '예노' 어때, 예노?" 원래의 의미를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우리만의 단어가 되니 더 특별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그 속에 숨은 뜻 - 창피해ㅠ -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의 언변에 넘어간 척 그러자고 했다.


그는 그렇게 나만의 '예노'가 되었다. 매일 지하철역으로 마중 와 집에 데려다줬고, 짐은 물론이고 가방 하나 덜렁 매고 있을 때도 재깍 가지고 가 대신 매고 걸었다. 나에겐 꼭 맞던 가방이 그의 등에 얹혀지니 유난히 작아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니,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후 두 번의 겨울을 보내고 그의 부모님께 드릴 첫인사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지하철역 앞에서 만나 밀린 낮의 이야기를 나누며 미리 정해둔 저녁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2미터 앞 신호등에 초록불이 깜빡이고 있었고 원체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그를 따라 달렸다. 


그런데 뭐가 자꾸 등을 친다 했더니 아직 가방이 내 어깨에 걸려있었다. 다리를 쉬이지 않은 채 가방을 벗어 한 발 앞선 그의 팔에 걸었다. "애기야, 가방!" 그가 자연스레 가방끈을 추스르며 말했다. "나중에 우리 엄마 앞에선 그러면 안돼~"


그가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초록불이 언제 빨간불로 바뀔지 모르는 와중 횡단보도 위에서 가방을 건넨 나, 역시나 다리를 바삐 움직이는 동시에 가방을 받아 맨 그, 그리고 계속 이렇게 함께할 거란 기대가 우리를 웃게 했다.


그의 부모님, 그리고 형님네 부부와 함께한 저녁식사는 성공리에 끝이 났다. 내 가방은 내가 들고 그의 그릇도 내가 채워주며, 어머니에게 둘째 아들이 잔뜩 챙김 받는 모습을 보여드렸다. 나는 노예, 아니 '예노'와 결혼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항상 나보다 더 피곤했다. 한창 데이트 중 대화에 집중을 못하기도 하고 길을 걷다가도 금방 음료수나 앉을 곳을 찾았다. 그땐 몰랐지만 이젠 안다. 그의 어깨는 내 짐을 드느라 항상 나보다 더 무거웠고, 그가 걷는 거리는 나를 바래다주느라 항상 나보다 더 길었기 때문이라는 걸. 


왜 그렇게 체력이 약하냐고, 좀만 더 놀다 자자고 보채지 말아야지. 더 아끼고 챙겨줘야지. 그는 노예가 아니라 나의 애기니까. 




*. 왜 '애기' 냐면요..


*. 표지 사진 : Photo by Henry & Co. on Unsplash



이전 23화 집순이가 집을 나가면 생기는 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