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hl Sep 12. 2020

저는 남편 덕후입니다

성덕이라고 할 수 있죠.

그는 항상 나보다 일찍 일어난다. 출근시간이 빨라서인 것도 있지만 주말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지~"라며 10시로 알람을 맞출 때, 그는 "내일은 늦잠 자야지~"라며 9시 반으로 알람을 맞추는 식이다. 


덕분에 아직 졸리지 않은 상태로 남편을 따라 침대에 누운 나는 종종 잠든 그의 얼굴을 마주한다. 한참 후, 어두운 방 홀로 빛을 뿜는 간접등에 누렇게 뜬 몰골로 그의 얼굴을 응시하는 내 모습을 깨닫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나는 남편 덕후구나.'

위험하다, 감정.



만성적인 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부쩍 자세에 관심이 많아진 남편이 뒤통수를 베개의 정 중앙에 누이면 첫눈에 반했던 그의 옆얼굴이 두드러져 보인다.


크고 높은 코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미간 바로 아래에서 그대로 쭉 뻗어 끝이 들리지도, 내려가지도 않아 이등변 삼각형을 반으로 뚝 자른 듯 반듯한 코. 위로 올라가면 입체적인 눈썹 뼈가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에 다크서클이 가세해 그의 눈을 더욱 깊어 보이게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군대에 있을 때 UN 연합군이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아래로 내려오면 얕게 파인 인중이 만든 두 개의 입술 산이 보인다. 입술은 쪽- 입맞춤을 할 땐 충분히 폭신하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다툴 땐 더없이 얇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괜스레 뾰로통해질 즈음, 아랫입술 밑에서 유선형으로 떨어지는 턱에 눈길이 닿는다. 짧지 않은 턱 때문인지 나는 청첩장을 돌리며 예비 신랑이 교포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맘에 쏙 드는 이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속으로 감탄을 한다. '이 남자가 내 남편이라니, 이상형과 결혼했으니 이거야말로 성덕 아닌가!' 그리곤 영화 <스타 이즈 본>의 여주인공 앨리처럼 검지를 들어 그의 옆라인을 좇는다. 넓은 이마부터, 미간, 코, 인중도 빠질 수 없지, 입술, 그리고 턱까지.


손은 또 어찌나 고운지. 손등은 주름 없이 보드랍고 손가락은 두드러진 마디 없이 매끈하며 적당히 긴 손톱은 거스러미 없이 깔끔하다. 적당히 두툼한 손바닥 덕에 보고 있자면 젖살이 포동한 어린아이의 손이 떠오른다. 아빠도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사위가 된 그를 보고 "손이 진~짜 이쁘네이."라며 껄껄 웃었다.



내가 아무리 얼빠라도 그의 얼굴에만 반한 것은 아니다. 어색했던 첫 만남을 두 번째 만남으로 이끈 건 그의 외모였지만, 세 번째 만남을 '오늘부터 1일'로 만든 건 그의 성격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든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음식점 점원의 기계적인 "또 오세요."나 카드만 달랑 주는(영수증이 필요하냔 말도 물론 없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침묵에도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물음에 그는 "인사는 돈 드는 게 아니잖아."라는 교과서 같은 답을 했고, 매사에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따지는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신기하기도 하고 내심 좋아 보이기도 했다.


또 욕을 절대 하지 않는다. 평소에 화 자체를 잘 안내는 데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아~ 진짜 왜 그러지?"라고 하는 게 전부다. 욕을 하고 싶어 하는 건 그리고 가끔 실행에 옮기는 건 언제나 나다. 보통은 "아, 나 진짜 열 받아. 욕해도 돼?"라고 그에게 허락을 구하는 식이지만, 운전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이런 어여쁜 자식을 봤나!'와 비슷한 말이 쌍자음으로 튀어나온다.


남에게 싫은 소리도 못한다. 덕분에 뭘 깎아본 적이 없다. 집을 살 때 중개사를 통해 몇백만 원을 깎고 인테리어를 할 때 폴딩도어 두 장을 공짜로 받은 건 모두 나였다. 내가 "한 번 얘기나 해봐~"라고 찔러 차를 살 때 선루프 선팅을 서비스로 받은 게 그가 간접적으로나마 뭔가를 깎아본 유일한 경험이다. 그 딜러를 소개해준 동기형은 우리에겐 60만 원을 더 내야 된다고 했던 선팅 업그레이드를 무료로 받았다고 하지만 말이다. 


최근에 알게 된 건 전화를 끊을 때 항상 상대가 먼저 끊기를 기다린다는 점이다. 부모님이나 회사 상사와의 전화는 물론이고 친구와의 통화, 심지어는 배달원에게서 걸려온 "문 앞에 두고 가요~"라는 말에도 그는 좀처럼 통화 종료를 누르지 않는다. 그런 그의 모습이 답답하기도 하고 상대가 오히려 의아해할 것 같단 생각도 들지만 그만의 예의니까. 다만 그 마음이 상대에게도 잘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구구절절 그의 좋은 점을 늘어놓았지만 실은 그의 모든 게 좋다. 긴 얼굴에 안 어울리는 앙증맞은 귀도, 때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뱉는 적당히 낮은 목소리도, 목덜미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도(왜 서른이 넘은 남자에게서 베이비파우더 향이 날까?). 좋아하는 빨간 음식을 먹을 때 꼭 옷에 흘리는 것도, 화장실 가는 걸 부끄러워해 매번 음악을 크게 듣고 있으라고 하는 것도(난 변비도 커밍아웃했는데!), 밤늦게 침대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으면 자다가도 일어나 "애기야, 잠 안 와?"라고 걱정스레 물어봐주는 것도.


더 나이가 들면,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언젠가 그의 숨소리조차 싫어질 때가 올까?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의 유통기한이라는 게 우리에게도 있을까?


아무렴 어떠랴. 나는 오늘도 남편을 덕질한다. 탈덕이란 없는 것처럼.






이전 25화 남자 친구와 남편의 차이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