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의 3박 4일 발리 여행기
셋째 날이 밝았다. 엄마와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그랜드 하얏트 발리
오늘 일정은 조금 늦게 시작한다고 해서, 출발 전에 느긋하게 밥을 먹고 호텔 수영장에 가보기로 했다. 미리 옷을 다 갖춰 입고 밥을 먹으러 가는데, 가는 길에도 포토존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해 엄마에게 여기저기 서보라고 주문을 해가며 아침부터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조식을 먹으러 가는 길에도 눈이 피곤할 일 없는 초록색의 대향연에 피곤함 없이 상쾌한 아침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요즘처럼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는 날엔 더욱 그리운 그날의 풍경과 공기.
적당히 사진을 찍고 들어와 안내된 자리에 앉아 본격적인 식사를 했다. 빵을 좋아하는 엄마를 닮아 빵순이인 나는 빵을 종류별로 담아와 커피와 함께 즐겼다. 물론 엄마를 위해 요구르트에 과일을 얹어 가져오고, 웨이터에게 카푸치노를 주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침을 거하게 먹고 레스토랑 바로 근처에 있는 수영장에 갔다. 아침저녁으로는 살짝 서늘했던 날씨라 우리는 겉옷을 벗고 얼른 물에 들어갔다. 비수기였던 터라 사람이 별로 없어, 우리는 문자 그대로 물 만난 듯 수영장을 누비고 다녔다. 엄마와 나는 둘 다 수영은 1도 못했지만, 역시나 아름다운 수영장을 구경하고 곳곳에서 기념촬영을 하며 그 시간을 즐겼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둘째 날 래프팅 체험을 하며 적극적이고 도전을 즐기는 엄마의 모험가적인 기질을 다시 발견하였다. 그래서 전날 저녁 엄마가 준 돈으로 열심히(?) 배운 영어로 브로셔를 읽고 알게 된 워터 슬라이드를 타러 갔다.
하도 인적이 드물고 고요해 운영을 안 하나 했는데, 다행히 운영을 하고 있었고 워터 슬라이드를 즐기려는 이는 엄마와 나, 단 둘 뿐이었다. 우리는 워터 슬라이드를 타고 또 탔다. 엄마의 첫 워터 슬라이드였다. 엄마는 친구나 동료분들과 그렇게 여행을 다녔어도 이렇게 수영장에 온 건 처음이라고 했다. 그 비싼 호텔에 묵으며 수영장 구경도 못했던 게 안타까웠지만, 이번엔 수영장에서 실컷 놀고 워터 슬라이드까지 태워드렸다는 데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이야말로 석탑이나 사원 등을 구경하는 진짜 '관광'을 하는 날이었다. 가는 길엔 현지인 가이드가 인도네시아와 발리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었다. 덕분에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데 발리는 특이하게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리고 외국인이 현지에서 가이드를 하는 게 불법이기 때문에 현지인 가이드를 고용해야 해서 한국어와 관광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학원들이 많다는 것 등 흥미로운 내용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귀로는 이야기를 주워 담고 눈으로는 창밖 풍경을 좇다 보니, 도로와 집들 사이사이에 놓인 석상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마치 우리나라 해태를 닮은 듯 상상의 동물처럼 생기긴 했으나, 사람처럼 치마를 입은 게 특이했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발리에서는 신들도 사람처럼 생각해 추울까 봐 옷을 입혀준 거라고 하며, 옷이 보통 흑백의 체크무늬로 되어있는 이유도 설명해주었다. 힌두교에는 다양한 신들이 있는데, 검은색은 악신, 하얀색은 선신을 뜻하여 그 둘이 공존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했다.
발리라는 곳이 바다와 외국인이 가득한 관광지가 아닌 생활 속 깊이 종교가 자리 잡은 한 도시로 다가왔다.
가루다 공원(GWK culture park)
눈과 귀로 바쁘게 새로운 정보들을 훑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인 가루다 공원에 도착했다. 가루다는 비슈누라는 힌두교의 3대 신중 한 명이 타고 다니는 독수리 이름으로, 가루다 공원의 정식 명칭은 그들의 이름을 딴 GWK(Garuda Wisnu Kencana) culture park라고 한다. Kencana는 인도네시아어로 황금을 뜻해서, 공원의 이름은 그 자체로 공원은 물론 발리의 랜드마크가 될, 비슈누가 가루다를 타고 있는 황금동상을 뜻하는 것 같다.
힌두교 신을 위한 공원이라선지 짧은 하의를 입은 사람은 갈색 천으로 긴치마를 만들어 걸치고, 긴 하의를 입은 사람은 노란 띠를 허리에 두르도록 했다. 말없이 건네주는 천을 들고 요령껏 바지 위에 두른 채 공원에 들어가니, 거대한 가루다의 상반신 청동상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카메라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였지만, 일행 분이 사진을 잘 찍어주셔서 멋진 사진이 나왔다.
좀 더 들어가니 다른 동상들과 다양한 조형물들이 있었고, 우리는 각자 자유롭게 구경을 했다. 이곳저곳을 유심히 살피며 열정적으로 가이드에게 질문을 던지는 분들도 많았지만, 나와 엄마는 같이 찍은 사진을 늘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넓은 공간 이곳저곳에 웅장한 동상들이 자리하고 있던 그곳을, 한국의 11월과 다른 무더운 날씨를 즐기며 살짝 느릿하게 걷다 보니 어디선가 소리가 났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가이드들이 곳곳에 서서 안내해준 덕분에 금방 공연장을 찾아 자리에 앉았다. 무대엔 화려한 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푸른 옷의 연주가들이 들려주는 라이브 음악에 맞춰 유연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얼핏 보면 팔과 손만 적당히 움직이면 될 것 같아 흉내를 내보려 하니 잘 되지 않았다. 뜨거운 태양에 흐물 해진 것 같았던 손목이, 막상 움직여보니 그렇게 뻣뻣할 수 없었다.
공연을 보다 시선을 살짝 내리니 히잡을 두르고 나란히 앉은 네 여성이 보였다. 인도네시아인들은 대부분 발리와 달리 이슬람교를 믿는단 사실을 다시 상기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의 옷차림이었다. 까만 단색이 아닌 화사한 빛깔과 다양한 무늬의 히잡을 쓴 그들은 머리 위에 멋들어진 선글라스를 하나씩 올려 세련된 스타일을 완성시킨 것처럼 보였다. 한 명은 손에 한국식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 있기도 했다. 무의식 중에 이슬람교에 전쟁과 어두운 이미지를 씌우고 있었던 나를 발견하고 잠시 반성을 했다. 이렇게 여행은 새로운 풍경과 낯선 이들을 통해 시시때때로 나의 시각을 넓혀준다.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다.
중간에 성우가 내용 설명을 해주고 배우들은 말없이 몸으로만 연기하는데, 인도네시아어로 얘기하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권선징악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보니 대충 이해가 됐다. 결국은 비슈누(선)가 악을 몰아냈고, 공연은 막을 내렸다.
점심은 공원 내에 있는 레스토랑에 준비됐다. 채소부터 면과 밥, 고기에 후식으로 과일까지 다양하게 차려져 있었는데, 모두 입에 맞고 맛있어서 시원한 빈 땅을 곁들여 배부르게 먹었다. 식당을 나와 걷다 보니 붉은 꽃이 열린 커다란 나무들이 보였다. 바닥에 흩어진 꽃잎들을 보고 엄마는 사진을 요청했다. 자연스레 꽃받침을 하고 나무 그늘에 앉은,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절벽사원
이어 절벽사원을 찾았다. 한참을 올라 바라본 절벽과 그 절벽에 부서지는 새하얀 파도를 보다 보니,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곳곳에 핀 환한 빛깔의 꽃들은 그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했다.
구경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어 가봤더니 원숭이가 선글라스를 들고 있었다. 이 곳에 오는 차 안에서 가이드가 이 곳 원숭이들은 가끔 선글라스나 가방을 갖고 달아난 후에 그걸 담보로 먹을 걸 달라고 한다며 조심하라고 했는데, 정말이었다! 덕분에 못 끼고 있다가 내려오면서 '에이, 원숭이 없네~'라며 꺼내 쓴 선글라스를 다시 슬그머니 가방에 집어넣었다. 녀석은 관광객이 던진 바나나 껍질을 낚아채 빈 것을 확인하곤 선글라스를 내주지 않더니, 진짜 바나나를 던지자 그걸 받자마자 선글라스를 바닥에 내동댕이 처버렸다. 얕은수에 속지 않고 원하던 것을 얻어낸 녀석의 모습에 왠지 모를 웃음이 났다.
빠당빠당 비치
이 날 관광의 마지막 코스는 빠당빠당 비치였다. 발리에 있는 건 몰랐지만, 그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곳이라 기대가 컸는데... 실망도 컸다. 제주도의 여느 해수욕장보다 작아 보이는, 절벽으로 막힌 그곳은 그저 평범한 소규모 해변으로 보였다. 물놀이나 보드를 즐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수영복도 챙겨 오지 못한 우리는 그저 한 군데 모여 멀뚱멀뚱 그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찾은 바다에 엄마는 기분을 내고자 물에 발을 담갔고, 나는 그런 엄마를 또 카메라에 담았다.
때마침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던 일행은 점차 발길을 돌렸다. 자리를 뜨려는 찰나 엄마가 사진을 제안했다. 혼자, 또는 친구들과 특별한 장소에서 곧잘 남기곤 했던 발 사진을 엄마가 먼저 찍자고 해서 놀랐다. 나도 몰래 '엄마는 요즘애들이 여행 가서 이런 거 찍는 건 모르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렇게 내 맘속에 몰랐던 엄마의 모습을 새겼고, 머나먼 발리엔 우리가 함께한 발자국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