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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hl Mar 31. 2019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솔루션

책 <궁금해요, 모모쌤의 독서테라피>를 읽고...

불금을 보내기 위해 거리로 나온 학생들 사이로, 나는 쏟아지는 비를 반은 맞고 반은 작은 우산으로 가리며 길을 헤매고 있었다. 약속시간엔 이미 늦어버렸고, 늦은 걸 만회하기 위해 급히 산 도넛 상자 속에선 동그란 빵들이 방향을 잃고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몇 년 전 근처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 병원을 지나 큰 호수만 찾으면 된다고 간단하게 생각했지만, 서울에서 7번째라는 이 큰 캠퍼스에서 호기롭게 지름길로 가겠다고 한 것이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시간을 20분이나 넘겨서야 겨우 학생회관에 도착해 허겁지겁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어두운 밤 비에 젖어 축축한 신발에 갇힌 발걸음을 재촉하며, 서두르다 숨이 차 빨개진 얼굴을 하고 불 켜진 강의실에 들어서는데... 모모쌤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해주셨고, 갑자기 영화처럼 주위가 환하고 따뜻해졌다.


어두운 길 끝에 드디어 광명이 보였던 그 순간 Photo by Stephen Leonardi on Unsplash


덕분에 한결 편한 마음으로 '행복한 독서치료' 특강을 들었고, 2시간은 마치 20분처럼 쏜살같이 지나갔다.




얼마 후 그러한 모모쌤의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담긴 책  <궁금해요, 모모쌤의 독서테라피>를 읽게 되었다. 당시 특강에서 경험한 독서치료를 실제 다른 치료사들이 따라 하거나 응용할 수 있도록 워크시트까지 담은 실용서였다. 하지만 치료사 자격증을 갖고 있지 않은 나에게 이 책은 마치 따뜻한 수필 같았다. 


책은 청소년들이 또래 친구들 또는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 대해 폭넓게 다루고 있었는데, 실제 함께한 아이들의 사연과 직접 작성한 글들을 읽고 있자니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대부분이 청소년들은 물론이고 부모를 포함한 성인들도 충분히 겪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청소년의 정서조절 - 잘 거절하고 있나요?

얼마 전 들었던 특강의 주제인 '잘 거절하고 있나요?'도 본문에 수록돼있었다. 처음엔 평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서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거절을 잘하는 사람이니, 그렇지 않은 다른 분들 이야기나 들어보자'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같이 참여한 분들의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나도 좀처럼 의식하지 못했던, 친언니에게만은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인식하게 되었다. 

곰씨와 토끼의 마음이 어땠을지를 번갈아 맞춰볼 때는 '~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는 식으로 마음이 아닌 생각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발견했고, 기쁘다, 슬프다와 같은 '감정단어'를 통해 감정을 제대로 인지하고 표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아존중감과 또래관계 향상 - 내 친구는 어디 있을까?

Social Atom이라는 생소한 매체를 이용한 사례도 소개돼있었는데, '남자는 세모, 여자는 동그라미로 그린다'라는 단순한 명제 하에 아이들의 다양한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라웠다. 어떤 아이는 엄마의 동그라미와 아빠의 세모를 멀찍이 떨어뜨려놓고, 오빠의 세모는 마치 점처럼 아주 작게 표현했다. 그리고 어떤 아이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머니까지 교집합이 생기도록 가깝게 겹쳐놓고, 좋아하는 친구는 그냥 '친구'가 아닌 친구의 이름을 직접 적어 부모님 바로 옆에 놓았다. 

'치료'라는 말을 붙이면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 수 있는데, 별 의미 없는 듯 놀이처럼 가볍게 할 수 있는 활동이 아이들이 직접 말하게 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다문화 수용성 향상 - 자아정체성을 탐색해요

본문에 소개된 다양한 책과 영화들은 모두 흥미로워 보여 한번쯤 읽고, 감상하고픈 마음이 들게 했는데, 그중에서도 <빨강:크레용의 이야기>는 정말 기발했다. 빨강 옷을 입고 있었지만 빨간색 그림은 그리지 못했던 빨간 크레용이 나중에 자신이 옷을 잘못 입은 파란 크레용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하고 넘길 수도 있는 글이지만, 한편으론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흔히 겪는 일에 빗댈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학교, 회사 등 같은 집단에 있는 빨강이들과 지내면 나도 당연히 같은 빨강일 거라 생각하게 되는데, 빨간색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이 남들은 다 하는 일들을 나는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되면 자괴감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빨강이 아니라, 파랑이었다면?

나는 나이고 그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똑같은 사실이 뭔가 나를 위축시키는 것으로부터 당연한 것으로 변하고, 오히려 알지 못했던 나의 정체성을 찾게 한 기쁜 일이 된다. 

혹시 나도 옷을 잘못 입고 괴로워하는 건 아닐까?


부모-자녀 관계 회복 - 완벽한 엄마는 없어요

이제 청소년보다는 그 엄마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되고 보니 엄마가 마냥 크기보단 때론 너무 작은 존재란 생각이 든다. 청소년기의 아이처럼 그 엄마 또한 그저 한 명의 사람이고, 요즘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처럼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완벽할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렴풋한 기억 속 엄마에게 화를 냈던 것도, 어쩌면 항상 나를 보듬어주고 아껴줘 야만 할 것 같은 존재에게 질타를 받고 그가 내 기대와 달리 완벽하지 않다는 것에서 실망감을 느낀 탓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의 나처럼 원하는 걸 척척 알아서 갖다 주고, 맛있는 음식도 뚝딱 만들어주는 완벽한 엄마를 찾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 등을 헤아려보며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외 여러 부분에서도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다양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이 갖고 싶은 것으로 몸짱, 아이돌급 외모를 1-2위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나 엄마의 잔소리보다 높은 순위에 놓은 걸 보곤 조금 놀랐다. 

<눈물바다>라는 책에서 주인공이 눈물로 바다를 만들어 자신을 힘들게 한 사람들을 잠기게 했다가 빨랫줄에 널고 시원해했다는 이야기를 읽고는, 슬플 땐 참지 않고 실컷 울었다가 그 기억들을 빨랫줄에 널고 잊어버리면 되겠단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얼굴에 큰 점이 있어 이를 선크림을 두껍게 발라 가리고 다니는 아이가 영화 <원더>를 보고도 웃지 않았단 얘기를 읽었을 땐, 그 고통의 깊이가 느껴져 마냥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감정을 간접적으로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으로부터 따뜻함 울림이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빼앗긴 시간을 다시 찾아준 모모의 이야기처럼, 독서치료를 통한 모모쌤의 따뜻한 솔루션이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고통을 받는 아이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되찾아줄 수 있길 바라고 또 믿으며 이 글을 마친다. 







*. 표지 사진 : Photo by Ben Whit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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