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언어의 온도>를 읽고
1년 넘게 만난 연인은 요즘 야근이 잦다. 이직한 지 6개월이 갓 넘었으나 없는 배짱을 부리며 칼퇴를 하고 돌아와, 고양이들 간식을 챙겨주고, 미세먼지를 씻어낸 후 자리에 앉아 저녁을 먹고, 부른 배로 기분 좋게 아이패드로 그림을 끄적일 즈음에야 그의 퇴근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던 터라 씻기만 한 채 수더분한 차림으로 동네 데이트를 즐기는 날이 잦았지만, 당연하게 여겨졌던 일상이 조금 바뀐 탓인지 어제는 오랜만의 데이트를 위해 올블랙으로 차려입고 향수도 뿌려 멋을 냈다.
하지만 함께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이, 기다리던 영화를 보며 함께 흥분했던 순간이, 그리고 그의 작은 노트북 앞에 머리를 맞대고 여름휴가 계획을 짜던 순간이 모두 무색하게 우리는 사소한 일로 다투고 헤어졌다. 집에 바래다준 그에게 내가 건넨 마지막 말은 '안녕'이었다.
그때 그 순간의 '안녕'이란 언어의 온도는 몇 도였을까
글로 적어두면 같아 보이지만, 그때의 상황과 화자와 청자의 관계, 그리고 말소리의 높낮이 등을 다 따져보면 언어의 온도는 여름과 겨울의 그것보다 더 큰 차이가 나곤 한다. 버스 안에서 아주머니의 통화를 엿듣고, 길에서 마주치는 노부부의 행동을 관찰하고, 매일 마주치는 경비원 아저씨의 수첩을 훔쳐보며 그러한 언어의 온도를 이야기하는 작가가 있다.
이렇게 묘사해놓으니 남일에 사사건건 간섭하기 좋아하는 오지랖 넓은 이가 떠오른다. 하지만 작가는 본인이 태어나기도 전인 40년 전의 친구를 찾고 싶다는 엄마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 회사에 연차를 내고, 백에 구십은 흘려들을 기사를 국어사전을 찾아가며 신중히 단어를 골라 잔잔한 감동을 더한 이야기로 각색한다.
그렇게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글을 읽다 보면 간결한 문장 뒤에 감춰진 따뜻한 언어의 온도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일분일초도 아까워 걷든 서든 손에 쥔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과 달리, 그는 찰나로 스쳐가는 낯선 이의 말에도 공감하고, 익숙해진 풍경도 계속해서 다시 보며, 무관심에 익숙한 이들의 삶에 관심을 갖는다.
책에 담긴 짧고 긴 편(篇)들 중 '무지개다리'라는 글이 있다. 옆집 부부가 같이 살던 개를 화장(火葬)하고 돌아오며 슬퍼하는 것을 보고 쓴 글인데, 그가 그리는 천국의 모습을 읽다 지하철에서 눈물을 찔끔 흘릴 뻔했다.
그리움만 쌓여가던 어느 날, 한 마리 개가 동작을 멈추고 반대편을 응시한다. 코를 벌렁거리며 익숙한 냄새를 알아차린다. 녀석은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무리에서 벗어나 바람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한다. 날아갈 듯 발걸음이 빨라진다. 개가 향하는 곳에 누군가 서 있다. 바로 당신이다. p.166
이 글을 읽고 어린 시절 동생과의 추억이 서린 해리포터를 인생 책으로 꼽으려던 맘을 바꿨다. 책을 다 읽고 맨 뒤 커버에 적힌 <말의 품격>, <한 때 소중했던 것들> 이란 활자를 읽으며, 중학생 시절의 무라카미 하루키, 고등학생 시절의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리고 대학생 시절의 알랭 드 보통 이후로 오랫동안 남아있던 공백이 채워지는 걸 느꼈다.
어제 나는 그렇게 미지근한 말을 전하고, 사랑에 의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연인은 일요일인 오늘도 쌓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출근을 했다. 그리곤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인사는 건너뛰고 한참 후 나의 안부를 물었고, 나 또한 여느 때와는 달리 느낌표 대신 물결표로 채운 답장을 보냈다.
앞으로 우리가 주고받을 언어의 온도는 몇 도쯤 될까? 뜨겁고 차가운 마음들이 뒤엉켜 겨우 뱉어낸 16도의 '안녕'은 시린 겨울바람을 닮은 -22도의 '안녕'으로 되돌아올까, 아니면 뜨거운 여름 해를 닮은 35도의 (그래도) '사랑해'로 변모할까? 작가의 글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으며 글을 마치려 한다.
사랑은 동전의 양면 같은 성격을 지닌다.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들이밀기도 하지만, 그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리는 것 역시 사랑이라는 이름의 동아줄임을 부정할 수 없다. p.183
*. 표지 사진 : Photo by Josh Felis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