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백석,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당대의 여심을 사로잡은 경성 최고의 모던보이.
그가 더블 버튼 양복을 입고 파마머리 휘날리며 걸어가면 경성의 거리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그런 잘난 인물이 평안도 말씨로 지극히 조선다운 음식과 정취와 거리와 사람을 노래하니
누군들 홀리지 않았으랴.
일제강점기 말, 젊은 지식인들이 펜을 놓을 수밖에 없던 서슬 퍼런 시기에
만주로 떠나 간 방랑자이자 방황하는 청춘이었다.
이후 38도선이 그어지자 발이 묶여 벗도, 직장도, 사랑도, 추억도 경성에 남긴 채
고향 평안도 정주밖에 갈 곳이 없었다.
때문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은 월북시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지워져야만 했다.
1988년 월북문인에 대한 해금조치로 다시금 빛을 보게 된 백석의 시는
여전히 아름답고 절절했다.
많은 문학도의 영감을 깨우고 학자들의 연구정신을 불태우는 그의 시는
현재 진행형임이 틀림없다.
나 또한 백석의 시에 열광하는 한 명의 문학도이자, 백석을 사랑해 마지않는 소녀팬이다.
학창 시절 국어시간에 백석의 시를 만났다.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 누워
어늬 아츰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백석의 「고향」이었다.
무던하니 담백하게 읽히던 그 시가 나에게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마지막 문장 때문이었다.
고향(故鄕)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그 한 문장이 뭐라고,
그 한 줄로 인해 백석의 시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백석의 글을 읽고, 백석에 관한 논문을 찾아보고, 백석을 다룬 책을 사들이고
그렇게나마 백석을 만나고자 했다.
38도선의 금에 막혀, 생과 사의 시간이 갈려, 차마 못 볼 백석과
어떻게든 이어지고자 애를 썼다.
안도현의 『백석 평전』 서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때로 백석의 시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빠져나올 수 없었고,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빠져나오기 싫었다.”
감히 그에게 비할 만한 열의를 가지지는 못했으나 나도 비슷한 처지였다.
백석에게, 백석의 시에 한 번 빠진 이후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더 깊게 빠져있고 싶었다.
학문적인 성과를 이룰 만큼 대단한 연구를 할 능력도,
이 분야에 관해 권위자가 될 만큼 무언가를 잘 아는 것도 아니지만,
백석을 좋아하고 그의 시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저 좋아하는 만큼 읽고 싶고 쓰고 싶은 순박한 욕심이다.
그 욕심으로 이렇게 편지를 쓴다.
홀로 읽던 백석의 시에 대한 감상이고
외로울 때 위로받던 기억의 독백이고
길을 걷다 문득 백석이 떠오르던 날의 일기이다.
수취인은 백석이나
결국 백석을 사랑하는 나에게로 부치는 편지이다.
답장은커녕 전해질 수 있을지 그조차 알 수 없는 편지다만,
쓰는 것만으로도 자기만족이니 그거면 되었다.
그럼에도 만일, 저 멀리 백석에게 내 편지가 닿는다면 참으로 여한이 없겠다.
2021년 10월 4일
담소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