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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르는마음 Apr 11. 2024

느긋하게, 쓰리시티즈 산책

시간이 멈춘 도시, 몰타 쓰리시티즈의 매력

'쓰리시티즈'는 몰타의 수도 발레타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비르구, 셍글레아, 코스피쿠아를 합쳐서 부르는 지명이다. 옛스러운 몰타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서 이곳을 걷고 있으면 마치 시간이 멈춘 옛 도시를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쓰리시티즈로 가기 위해 발레타의 페리항에 도착했다. 오전의 햇살이 한가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건너편으로 비르구의 성 안젤로 요새와 셍글레아가 보였다. 페리는 30분 간격으로 발레타와 쓰리시티즈를 오간다.  

페리는 출발한 지 얼마 안되어 셍글레아와 비르구 사이의 좁은 만으로 들어온다.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빽빽한 옛 건물들과 오래된 성당이 양옆에 펼쳐진다. 비록 10분도 안 걸리는 짧은 거리지만, 목적지까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간다는 것은 마치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는 듯한 설렘을 안겨준다.   

쓰리시티즈 중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성 안젤로 요새가 있는 '비르구'이다. 페리에서 내린 승객들은 대부분 비르구 쪽으로 향했다. 몰타에 살 때 비르구를 둘러본 적이 있는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셍글레아를 먼저 둘러보기로 하고 다른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자 황금빛의 마돈나 조각상이 있는 작은 광장이 나타났다. 가톨릭 전통이 강한 몰타에서는 이런 조각상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유럽 다른 나라들의 조각상에 비해 고전적인 스타일(?)이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지는 모습이다.

광장에 있는 상점에서 몰타의 대표 간식 파스티찌를 사먹었다. 파스티찌는 속재료가 다양한데, 치즈나 콩이 든 파스티찌가 대표적이다. 몰타에 살 때부터 나는 콩이 든 파스티찌파! 크기가 커서 간식이 아니라 한끼를 먹은 기분이 들었다.

파스티찌를 다 먹고 셍글레아 탐방에 나섰다. 정오 무렵의 셍글레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상점 앞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쉬고 있는 점원들 외에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쾌청했다. 몰타에 도착한 첫날 날이 좋았다가 이틀 동안은 계속 흐렸던지라, 파란 하늘을 보니 기분이 들떴다. 셍글레아는 몰타에서 일 년 가까이 사는 동안 와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구석구석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기로 했다.


적어도 몇 십년은 변화 없이 그 자리를 지켰을 것 같은 오래된 상점들을 지나쳤다. 거리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오래된 이곳에서 인위적인 새로운 것들은 없었다.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 따라 춤추는 발코니의 빨래와 좁은 골목길에서 눈이 마주친 고양이의 눈동자뿐이었다. 창문 앞에 멈춰서서 고양이와 꽤 오래 눈을 맞췄다. 

조금 더 걸어 발레타와 마주보고 있는 공원에 도착했다. 이곳과 반대로 저 너머 발레타는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북적일 터였다. 배를 타고 십 분도 안 걸리는 좁은 바다를 건너왔을 뿐인데 마치 다른 세계처럼, 

몰타의 청록색 바닷물. 그렇게 안 보이던 사람들이 아래에 모여있었구나. 

파스티찌를 먹긴 했지만 오래 걷다보니 배가 고파졌다. 다시 반대로 걸어 비르구로 넘어왔다. 박물관 옆에 있는 카페에서 배를 채우기로 했다. 

이 카페에는 아름다운 야외 정원이 있었지만, 소풍을 온 초등학생들이 야외 자리를 시끌벅쩍하게 채우고 있어서 한적한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내향인 본능에 따라 가장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는데, 옆에 있는 유리문으로 오후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서 구석임에도 환했다. 맞은편 벽면에는 카페 외관을 똑같이 그려놓은 예쁜 그림이 걸려있었다.

비건파니니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는 한국의 흔한 아아의 맛이라 감동이었고, 비건파니니 역시 훌륭했다. 햇살을 만끽하며 여유로운 식사를 마쳤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슬슬 돌아가기로 했다. 올 때는 페리를 타고 왔지만 돌아갈 때는 버스를 타기로 하고 새로운 길로 발길을 잡았다. 박물관 주변을 벗어나니 또다시 나만 남은 듯 거리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렇게 낯선 풍경을 걷다가, 이 풍경을 만났다. 좁은 인도와 양편에 펼쳐진 라임스톤 건물들, 색색의 테라스와 골목 끝에 빛을 받으며 서있는 둥근 지붕의 성당. 바다가 보이지 않아도, 너무나 몰타스러운 풍경이었다. 

한참 사진을 찍고 골목길을 벗어나자 널따란 광장과 함께 성당이 모습을 나타냈다. 몰타의 성당들은 다른 유럽 나라들의 성당에 비해 위압적이지 않은 점이 좋다. 주변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느낌이다. 

버스정류장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버스가 오지 않았다(몰타에서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결국 다른 정류장으로 걸어가 가장 먼저 온 버스를 잡아탔고, 페리항에 내려 페리를 타고 발레타로 돌아가게 되었다. 계획이 틀어졌지만, 덕분에 선인장이 무성히 자란 또 다른 새로운 길을 걸어볼 수 있었다. 여행에서 계획의 차질이 꼭 실패인 것은 아닌 이유다. 




일상에서 나는 모든 일을 계획하고 통제 하에 두려고 하며, 예상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떄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철저한 J형 인간이다. 하지만 여행에서까지 세세하게 계획을 세우고 일이 틀어질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여행지에서만큼은 통제 성향을 버리고 예측 못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저 받아들이고, 느긋하게 산책하는 마음으로 다니자는 것이 이번 여행의 계획 아닌 계획이었고, 몰타는 그 계획을 실천하기에 완벽한 여행지였다. 


몰타에 발을 딛는 순간 누구라도 저절로 느끼게 될 것이다. 이곳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과 청록빛 바다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과 걸음걸이가, 나른하게 누워있는 길고양이가, 그 모든 것들이 마치 급할 게 뭐가 있냐고, 느긋해지라고 말한다.


몰타의 느긋한 속도에 보폭을 맞춰 걸으며 다가오는 풍경들을 담아두는 것.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바쁜 일상 속에서 휘청거릴 때마다 그 풍경들을 한 장씩 불러내어 그때의 느슨했던 나를 상기해보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빠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휩쓸려가지 않고 나만의 속도를 유지하는 것. 몰타에서 배워온 것들이다.




                       *2023년 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초입에 2주 동안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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