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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답답하게 살고 있었구나

by 매실


여행을 가면 나는 꼭 카페, 전망대, 재즈바를 찾는다.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침내 여행이 시작되는 기분이 든다. 굳이 관광지를 돌아다니지 않아도, 평소 시간 낭비라고 여겼던 것들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그 느슨한 순간들이야 말로 여행의 본질처럼 느껴진다. 자극적인 장면만 빠르게 보여주는 영화에서 생략되는, 그러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불필요함들. 바쁜 일상 속에서는 이런 시간들이 절실하다. 흘러가는 시간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는 여유. 이런 기분을 알고 난 후부터 관광지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남들에겐 좋은 장소라고 해도, 내게는 금세 잊히는 기억들이 많았으니까.


전망대를 찾는 이유도 비슷하다. 내가 있는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한눈에 내려다보는 쾌감. 높은 곳은 늘 두려운데도, 전망대만큼은 이상하게 안락하다. 낯에는 문제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대한 평화로움을, 저녁엔 은은한 조명이 내려앉아 아늑함이 감돈다. 예쁜 것을 바라보면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오래 머무르고 싶어진다. 치앙마이 도이수텝을 찾았던 예전의 나도 그랬다. 어떻게 올라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300개가 넘는 계단을 헐떡이며 올랐고, 끝에 서서 펼쳐진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번엔 야경 투어로 왔다. 단독 투어인 줄 알았던 일정에는 다섯 팀 정도가 더 있었고, 우리는 그 사람들과 약 한 시간 정도 함께 이동했다.


가이드는 친절했다. 당연한 역할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 세심하게 챙김을 받는 경험은 언제나 따뜻하다. 가이드 말고 기억나는 또 다른 사람은 투어에 참여했던 한 할아버지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물으며 작은 노트에 이름과 특징을 한 줄씩 적어두었다. 영어로 물어볼 용기가 있었다면, 왜 그렇게 기록하는지 물었을지도 모른다. 상상하건대, 그만의 여행을 기억하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그는 낯선 사람들에게도 스스럼없이 스몰토크를 건넸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 눈치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그의 태도는 오랜 자유로움이 만들어낸 멋 같았다.


마지막으로 재즈바.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기를 했던 시절, 길에서 들려오던 재즈에 홀리듯 가게로 들어갔던 적이 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와인을 마시며 음악을 들었고, 취기 때문인지 공연의 열기 때문인지 몸이 붕 뜨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고 우리는 비를 맞으며 거리를 뛰었다. 젖은 머리카락과 후덥지근한 공기, 샤워 후에 먹었던 컵라면의 맛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날의 상쾌한 쾌감 덕분인지 그 이후로 여행지에서는 꼭 재즈바를 들른다. 재즈를 들으면 그 순간 모든 걸 내려놓고 자유로워지는 것만 같다.


이번 치앙마이에서는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노스 재즈바에 왔다. 예전에 올 때마다 자리가 없거나 닫혀있어서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더 간절했다. 공연 시작까지 한 시간이 남아 있었고,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며 그 시간을 채웠다. 나는 오랜만에 핸드폰도 하지 않고 멍하니 공연을 기다렸다. 핸드폰을 보는 귀찮음도 있었고, 정말 오래전부터 멍을 때리고 싶었기에 내 방식대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공연이 시작됐다. 내가 생각한 대로였다. 자유. 애써 말하지 않아도 표정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음악을 좋아하는지 보였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아직도 나는 내 일이 재미있지 않다는 거겠지. 공연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괜히 씁쓸했다.


무대가 잘 보이지 않아 고개를 빼서 봤다. 재즈를 아는 것도 아니고, 찾아서 들을 만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여행지에서 들으면 어깨가 절로 들썩거렸다. 재즈는 말했다. 틀린 음이란 없고, 마침 틀린 음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그래서 재즈에서 더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그들 역시 연주를 할 때마다 개개인이 삘받는 포인트가 보였다. 그럴 때마다 서로가 서로의 즉흥을 받아 음악을 완성했다. 정말로 그들이 만든 음악이었다. 좋아하는 걸 해내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잠시 잊고 있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도전하겠다고 다짐하고 한국에 돌아오면 공과금, 월세,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과 현실 때문에 잠시 미루고 있는 나의 꿈들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음악을 즐기면서 맥주를 마시자, 나도 그들과 함께 좋아하는 순간을 즐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스 게이트 재즈바에서 본 공연에서는 이런 현실을 잊게 해 주었다.

너 이거 좋아했잖아, 잊지 마!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자유를 좋아한다. 그래서 사무실 안에서 종일 일할 때 답답하고 숨통이 막히는 걸까. 그래도 살아가려면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잦은 이직은 내 커리어와 연봉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도 알고. 그렇기에 완전한 자유는 어렵겠지만, 타협 가능한 자유를 어떻게든 찾고 싶다. 여행은 언제나 이런 나에게 힌트를 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그리고 그 모든 답은 결국 나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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