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만든 이미지에 갇히기 싫지만, 결국은

by 매실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내게서 다른 모습이 나온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철없는 고등학생이 되고, 책을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면 차분해지고, 밝은 친구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유머러스한 사람이 된다. 비슷한 듯 다른 나를 만난다. 반면, 내가 감당할 범위를 넘어선 에너지 넘치는 친구를 만나면 불편하기도 한다. 그러다 그 친구로 인해 편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걸 보면 그 친구를 동경하게 된다. 나한테 없는 모습이다. 만약 내가 저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떨까? 모두가 날 좋아하려나. 이럴 땐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저런 친구가 되어 보는 상상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 가도 목소리가 작은 편에 속했다. 조용히 듣고 웃고 챙겨주는 사람이랄까. 그런 내 모습이 싫어서 나를 모르는 곳으로 왔는데도 똑같다니. 그럴수록 더더욱 새로운 나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내 한계를 스스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 속 친화력 만렙인 내 모습과 달랐다. 활발해지고 싶다며! 그럼 딱 한 발자국만 움직이면 되는데, 그걸 왜 실행하지 못하는 거야! 다들 나를 몰라도, 내가 나를 아니까 낯간지러운 걸까? 그러다 인도에서 만난 한 어르신이 해주던 말이 생각났다.


넌, 참 배려가 많은 사람이야. 여기 사람들은 이 사람이 휴지를 필요로 하는지 몰랐는데, 너만 발견하고 휴지를 가져다줬잖아. 얼마나 섬세하고 배려 깊어.


그 이후로 미웠던 내 성격을 다시 보게 됐다. 나는 소심한 사람이 아니라 배려 깊은 사람이었구나.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고 내 기분을 살피면서 말을 건네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구나. 내 성격을 답답하게만 바라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처음엔 이런 내 성격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다 보면,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약자였다. 나의 배려가 어느새 당연해지고 막대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가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얘 원래 이런 거 안 좋아해.'라는 말을 들을 때가 그렇다. 물론 내 취향을 온전히 알고 있는 친구들이라면 어떻게 알았냐며 웃고 넘긴다. 하지만 원래 좋아하는데, 저런 말을 들으면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반문하는 게 뭐가 어려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때는 일종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머쓱해할까 봐 그냥 안 좋아한다고 말했다. 내 진짜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는 모습이 되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난 뭐든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화장도 그랬다. 꾸미고 싶어도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면서 꾸미지 않았다. 이런 모습이 원래 나인 것처럼.


이랬던 적이 또 있나 생각해 봤다. 처음 만난 사람들을 보면 어색하기 마련이다. 그 어색함을 편안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가 나서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날엔 나를 조용한 콘셉트로 만든다. 원래 나라면 웃고 떠들었을 텐데, 그렇게 콘셉트가 만들어지니, 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조용해진다. 이번엔 내가 그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 속의 나를 만든다. 눈치가 만든 나이다.

그렇게 나라는 한 사람에 여러 명의 자아가 만들어지고, 분위기와 사람에 따라 다른 나를 꺼낸다. 요즘엔 어딜 가나 차분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럼 나는 정말 차분한 사람인 건가. 가끔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싫은 것 같은데 싫지 않고, 좋은 것 같으면서도 좋지 않다. 척하고 척하고 척하다 보니 나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온전히 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되나 보다.


온전한 나. 가장 편안한 친구랑 있을 때를 생각해 봤다. 여러 생각을 하지 않고 굳이 단어들을 고르지 않아도 편하게 내 말들이 나오는 친구를. 나는 장난기가 많았고, 유머를 좋아한다. 글을 쓰고 책을 좋아하다 보니 차분해질 수밖에 없지만, 낯가리는 관종이라,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 좀 서운하다. 나는 다수보다 소수가 좋고, 소수일 때 더 나다운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사람이 많으면 한 사람 한 사람 경청해야 하고, 그러다 누군가 나서는 사람이 생기면 내가 나서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여전히 나는 여러 모습 속에서 나를 고르며 사람을 만난다. 그냥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게 귀찮아서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 주는 건지, 이 모습조차 나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이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나답지 않다고 느꼈던 모습마저도 나의 일부이지만, 때로는 그 역할을 해내는 데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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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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