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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Aug 20. 2018

경험한 모든 것이 모여 있는 바다

제주도 동쪽 바다

경험한 모든 것이 모여 있는 공간

그런 곳이 있다.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모여있는 공간. 내겐 제주도 동쪽 바다가 그렇다. 누군가에겐 그냥 바다겠지만 나한텐 아니다. 새벽 아침 일출 보기 위해 바다 앞 벤치에 앉았다. 바다 끝 쪽에서 모닥불이 보였다. 그 불을 멍하니 보다가 인도에서 디아 띄울 때가 생각났다. "좋은 사람이 곁에 있게 해주세요" 내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바닷물의 흔들림에 뒤집히지 않도록 계속 디아를 봤었다. 사람에게 상처 받고 사람에게 치유되는 걸 보면 내 옆엔 늘 좋은 사람이 있었다.


스쿠터가 지나갔다. 치앙마이에서 가장 많이 들렸던 건 스쿠터 소리였는데. 이곳에 앉아만 있는데 그동안 여행하면서 만났던 순간들을 만났다. 오늘 한 가지 더 추가됐다. 혼자 일출을 보고 있을 때 두 마리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과 톳을 말리는 할머니, 주황빛 여명을 배경으로 운동하는 사람까지. 다들 여유로워지는 이 시간. 바다를 보면 이 분위기가 생각날 것이다. 제주도 동쪽 성산읍 바다.


도망치듯 온 제주도지만

떠나기 하루 전이 가장 운 좋은 날이다. 2018년 5월부터 7월까지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스텝으로 근무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하늘에 있는 비행기를 볼 때마다 집 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두 달이 지났다니. 사실 제주도에 도망치듯 왔다. 어른들이 말하는 "언제 취업하냐" "딸은 왜 집에만 있냐"라는 말이 싫어서. 제주도 한 달 살기를 알아봤는데 계속 구해지지 않다가 한 곳에서 오라고 했다. 처음엔 기뻤지만 게스트하우스를 지원할 때마다 떨어졌는데 왜 여기는 오라는 건지 불안하기도 했다. 우선 가겠다고 했으니 돌이킬 수 없다. 좋게 생각하며 짐을 정리했지만 친구가 블로그 평이 좋지 않다며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런 말이 나를 더 겁나게 했다. 그래도 여기보다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컸다.


어찌어찌 시간이 지났고 제주도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점이 많았다. 스텝 방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고 게스트하우스 관리하는 분이 부부가 아니라 남자분이라니. 최근에 안 좋은 기사를 접하면서 더 불안해졌다. 게스트하우스 살인사건.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된다.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제주도에 왔지만 여기도 현실이었다. 내가 버려야 할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벌레도 잘 잡아야 하고, 손님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도 다 정리해야 하니까. 그리고 어딜 가나 이상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


일은 뜻대로 되기 어렵다. 내가 생각한 게스트하우스 낭만도 현실과는 달랐다. 제주도를 선택한 이유는 없다. 제주도가 아니어도 상관없었고 그냥 떠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만날 때가 된 것 같아서.


삶에서 만나는 중요한 사람들은
모두 영혼끼리 약속을 한 상태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야.
서로에게 어떤 역할을 하기로 약속을 하고 태어나는 것이지.
모든 사람은 잠시 또는 오래 그대의 삶에 나타나 그대에게 배움을 주고,
그대를 목적지로 안내하는 안내자들이지


지구별 여행자 중에서 -


떠나기 전 아쉬움

사장님과 직원들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다. 여기 스텝은 한 두 달이 지나면 다시 육지로 돌아갈 사람이니까. 정 주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건가 싶다. 그 인상은 내가 여기서 더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만 커지게 했지만.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정 많은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지낼수록 불안은 사라졌고 오히려 즐거웠으니까. 내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조개를 캐거나 거북손 잡을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매일 즐거웠고 매일 무슨 요일인지 물었다. 시간 개념을 잊은 내가 신기하면서도 항상 놀랐다. "벌써 금요일이라고?" 두 달을 한 장으로 정리하려니까 페이지가 적게 느껴지면서 많게 느껴진다. 그만큼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여행은 보는 것도 좋지만 있을 곳 또한 중요하다고. 여행하는 순간도 물론 즐거웠지만 여기서 지내면서 스텝과 직원분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기억에 남는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어느새 끝나가니 처음엔 신났고 곧 아쉬웠다. 사장님이 보말칼국수 맛집을 알려주셨고 아침에 같이 가자고 하셨다. 다 같이 어딜 간 적이 정말 오랜만이라고 했다. 그 오랜만인 시간에 내가 포함되어 있어서 기분 좋다. 칼국수 대기가 있어서 바로 앞에 있는 바다를 보며 놀았다. 단체사진도 찍으며. 칼국수 먹는 동안 다들 말이 없었다. 배가 고팠고 맛이 있었으며 빨리 먹고 돌아가야 하기도 했으니까.


가족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가족이라고 하면 엄마 아빠 동생이랑 친척들 정도로 생각했는데, 피가 섞이지 않아도 이렇게 가족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나한테도 오랜만이다. 다들 짧은 여행을 마치고 일하는 곳으로 돌아왔다. 만약 그 보말칼국수를 먹지 않았다면 마지막을 여전히 아쉬워하며 돌아왔을 것이다. 즐거운 분위기를 그리워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서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좋다.


애틋하게 기억될 순간

떠나기 하루 전에 동생이랑 패들보드 타러 바다로 갔다. 해지기 전 시간에 갔더니 노을이 보였다. 노을을 배경 삼아 보드에 누워 하늘을 봤다. 바다는 잔잔했지만 가끔 오는 파도로 인해 넘어지기도 했다. 동그랗고 주황색 해를 보면서 그동안 여기서 보냈던 시간을 생각했다. 피식하고 웃음 나오네. 늦은 오후에 오징어배로 밝아진 바다를 보러 갔다. 멍하게 바다와 빛을 봤다. 난 이런 시간을 보낼 기회가 2달이나 있었다. 이제야 이 시간을 보내다니. 마냥 아쉬웠다. 아마 끝이라는 생각 때문이겠지. 이게 일상이었다면 이런 황홀하고 아쉬운 마음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뒤에서 기타와 노랫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들어도 되냐며 묻고 벤치에 앉았다. 앞에 있는 불빛과 음악이 어우러져 황홀하다 못해 울컥했다. 난 항상 마지막에 이런 좋은 운이 있다. 이 순간을 더 애틋하게 기억하고, 이 순간의 나를 그리워하고, 이 분위기를 추억할 기억이 생겼다. 동생들과 마지막까지 이 바다에서 함께 하다니. 그래서 내게 바다는 애틋하다.


마지막 날 일출

마지막 날이니 오늘은 반드시 일출을 봐야겠다. 동생과 같이 보기로 했지만 나만 겨우 일어났다. 사람들이 꽤 있었다. 구름이 많아 일출 보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뒤에 손톱만 한 해가 보였다. 이 많은 구름 속에서 해가 보이다니. 너무 좋으면서도 역시 내 마지막 운에 감사했다. 10분 정도 있으니 해가 완전하게 보였다.


그 여명 속에서 사람들은 뛰는 사진을 찍었고 운동을 했고 해를 한참 동안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바다 가운데 있는 낚싯배는 그물을 꺼내 낚시를 했다. 역광이라 검은 무언가로 보였지만, 여전히 인도의 디아를 생각나게 하는 낚싯배. 내가 제일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다 차려입고 나온 사람들을 보니 그들의 부지런함에 놀랐다. 여기서 살다 보면 여유를 넘어 게으러진다. 더 나른해져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해만 봐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리지만 그 한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


지나고 나면 추억으로 간직될 오늘

여기서 지내면서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만든 내 일상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아쉬웠고 여기 남겨놓은 사람들을 한참 동안 못 볼 생각하니 짠했다. 항상 끝이란 이렇다. 모든 마지막이란 이렇다. 그때의 나를 간직해줄 장소가 있다는 건 좋지만. 육지로 돌아왔다. 나는 아침, 저녁, 노을 지는 시간에 알람이 맞춰져 있다. 그 알람을 아직 삭제하지 않았다. 10시 25분에 알람이 울리면 지금 밥 먹으러 갈 시간이네. 19시 25분에 알람이 울리면 지금 일몰이 예쁠 시간이네. 혼자 그 시간을 추억하고 있다.


만약 안 좋은 기억만 있었다면 여기서 만들 일상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좋아서 육지에 있지만 마음만은 제주도인 것처럼 생활하려 한다. 매일 봤던 하늘도 여기선 건물에 가려 조금밖에 보이지 않지만 하늘도 보고. 달을 보러 밤에 나가기도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제주도에 갔을 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나를 반겨줄 사람이 있고, 오랜만이라며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볼 사람이 있다는 게 좋다.


나를 토닥여주는 제주도 동쪽 바다

손님 중 한 명과 바다를 보러 갔다. 그 손님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는 편이라 했다. 상대방이 악의 없이 말한 말에도 금방 상처 받지만 그냥 참을 뿐이라고. 답답해도 바다를 보면 그 답답함이 풀린다고 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이곳에 온다고 했다.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잊어버리기 위해. 한 장소가 누군가에겐 위로가 된다. 나도 손님처럼 바다가 특별해졌다. 내 모든 경험을 담고 있는 곳으로. 스트레스를 잊고 내가 만났던 모든 순간을 그리워할 수 있는 곳으로.


2018년 5월 16일 ~7월 18일 제주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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