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매실 Oct 06. 2019

그리움이 그리워서  여행하는 거 같아요

코타키나발루 자유여행 마지막

"코타키나발루 현지인 맛집을 발견하고 시내를 걸었어요" 다시 읽기



오늘도 역시 늦잠 잤다. 눈은 떴지만, 침대 곳곳을 뒹굴거리며 마음껏 게으름을 즐겼다. 잠깐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일어나 볼까 하고 앉았다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아. 그렇게 몇 분을 누워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나갔는지, 청소하는 직원들의 목소리와 분주한 움직임이 들렸다. “이젠 진짜 일어나자”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씻었다.


머리 말리는 시간 동안 책을 읽었다. 회사에 잘린 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적은 책이었다. 친구는 나와 비슷한 사람 같다며 이 책을 선물해줬다. 책 읽고 나갈 준비를 위해 신발장에 갔더니 내 신발이 없었다. 직원은 여기저기 내 신발을 찾아주려 했지만, 다른 사람이 신발을 신고 갔는지 이미 없었다. 마음에 드는 유일한 신발이었는데. 직원은 새 신발을 선물해주겠다고 했다. 아쉬움을 달래고 식사하러 왔다.


어제 먹었던 곳이다. 역시나 많은 사람들로 직원들이 바빠 보였다. 새로운 음식을 도전했는데 고수가 들어있었다. 망할. 고수를 걷어 내도 고수 향내가 남아있었지만, 국물이 진하고 맛있었다. 역시 사람이 많을 만해.


워터프론트 근처 통카페에 왔다. 한국어로 쓰여있는 걸 보니 여기도 한국 사람이 많은 카페인 듯 싶다. 창가에 있는 로스팅 기계를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코코넛 커피가 시그니처 커피였는데, 그만큼 맛있었다. 쉬다가 블루 모스크에 가려고 그랩을 불렀다.


기사님은 내게 물었다. "어디 어디 여행했어요? 섬에도 가봤어요?" "아니요. 그냥 계속 시내에만 있었어요" "(놀란 듯이) 네? 여기 섬 너무 예뻐요. 많은 사람이 찾을 만큼 예쁜데, 왜 안 가요?" "더워서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기사님은 내게 되물었고, 모스크 외에도 그냥 숙소 안에 있는 나를 답답해하셨다. 코타키나발루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데, 방안에만 있냐는 말을 이어가다 결국 기사님은 추가 요금을 주면 내가 시내 중에서도 굿 플레이스를 데려다주시겠다고 했다. RM 50, 약 15,000원. 블루모스크에 다녀오고, 어제 갔지만, 보지 못했던 핑크 모스크 비치 등 주요 관광지와 현지인만 구매하는 로컬 과일가게에도 데려다주셨다. 시내보다 2배나 저렴.

많은 곳을 보여주셨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랩 기사님과 나눈 대화다. "혹시 딸이나 아들 있으세요?" "딸이 3명 있어요. 한 명은 20살인가 21살이고, 둘 째는 25, 제일 큰 언니는 27살이에요. 아내가 2010년도 세상을 떠나서 싱글아빠예요"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영어로 말해야 해서 더더욱 어려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님은 괜찮다는 듯이, 이제는 무뎌졌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몇 분 뒤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꺼냈다. "당신은 좋은 아빠일 것 같아요"

사실 아까 나를 사진 찍어준 뒤 차로 돌아가는 길에 그랩 기사님의 뒷모습을 봤다. 짝다리를 많이 하셨는지, 딸 3명을 키우느라 여러 일을 하셨는지는 몰라도 한쪽 어깨가 많이 낮았고, 걸음걸이도 불편해 보이셨다.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많은 짐을 얻고 있는 것처럼. 가는 길에 막내딸이 다니고 있는 대학교를 보여주면서 우리 딸이 지금 여기서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있었다. 힘들어 보였지만, 딸만 생각하면 힘듦도 금세 잊게 되는 것 같다. 안녕을 말하고 다시 숙소로 갔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 때문에 오늘 선셋도 실패임을 예상했다. 혹시 몰라 해변으로 갔지만, 역시나 큰 먹구름들이 지고 있는 해를 가렸다. 틈 사이로 주황빛이 새어 나왔는데, 만약 먹구름이 없었다면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환상적인 일몰이 되었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쉬움에 바위에 앉아 조금이라도 먹구름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라 조용했다. 나처럼 옆 바위에 앉아서 선 셋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큰 카메라를 들고 나와 선 셋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먹구름이 이동하지 않았지만, 반대쪽 하늘은 조금 환한 주황빛이 보였다. 먹구름아 제발 사라져. 하늘과 달리 해변의 물살은 제법 셌다. 덕분에 바닷소리가 더해졌다. 바라던 선셋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그래도 내일은 성공하고 싶다.


배가 고파서 칠리 바닐라에 갔다. 치킨 스테이크와 또띠아로 된 스파이덕, 트로피칼을 마셨다. 2개의 메뉴를 한꺼번에 먹어서 배불렀지만, 너무 맛있었다. 헝가리 음식이라는 데 버섯과 치즈와 닭의 조합이 입 안에서 춤추고 있었다. 여기 단골 집이 될 것 같아. 집으로 돌아가서 친구들과 톡을 주고받았다.


11월에 대만을 가기로 했는데, 비행기를 언제 구매할지 타이밍에 대한 이야기였다. 비행기 금액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의 여행경비를 찾아봤다. 생각보다 저렴했다. 그렇다면 대만 살아보기 일정은 어떨까? 10월에 어떻게 일할 것인지 고민이 이어졌다. 여행 왔는데, 새로운 여행 계획이라니. 이건 점심 먹으면서 저녁에 뭐 먹을지 고민하는 것과 같다. 쨌든 역마살이 있던 나로 돌아온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돈 없는 백수지만. 현재를 즐길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이 이후에도 어제와 다르지 않은 하루들을 보냈다. 느지막이 일어나 숙소 앞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카페에서 글 쓰다 숙소로 돌아와 뒹굴거리고, 구름 낀 일몰을 보는 것과 같이. 어제는 하드락에서 일몰을 봤고, 오늘은 시그널 전망에서 일몰을 봤다. 10월부터 우기라 낮이나 밤에 비가 내렸고, 먹구름 때문에 일몰도 잘 보이지 않았다. 난 늘 비를 데리고 다닌다. 내가 여행 갈 때마다 비가 온다는 뜻이다. 우기인걸 알고 가긴 했어도 10월부터 비 온다고 해서 내가 있는 날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첫날 빼고는 다 비가 왔다.


덕분에 내가 생각한 황홀한 일몰은 보지 못했다. 석양 보러 왔는데, 석양을 제대로 볼 수 없다니 아쉬운 마음이 컸다. 한국에서 보낸 일주일은 금방 지나가곤 했는데, 여기서의 생활은 여행치고 길게 느껴졌다. 일몰이라는 목적 하나 때문인지, 늦잠자도 더 늦잠자도 될 것 같았고, 배고파도 귀찮아서 배고파 배고파를 외치며 다시 잠들길 원했다. 푹 자고 싶었다. 일몰을 봤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쩌면 떠나오는 것 자체로도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우기인 줄 알고 온 여행이니.


밥 먹고 있는데 비가 왔다. 그래 마지막 날까지 비가 와줘야지. 나는 비를 부르는 사람이니까. 비가 와서 시원했다. 늘 덥고 뜨거워서 숙소로 갈 생각만 했는데, 시원해지니 걷는 것도 괜찮았다. 우산 쓰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냥 비를 맞거나 히잡이 대신 막아줬다. 비가 와서 뛰려는 사람보다 신호를 건너기 위해 뛰는 사람이 많았다. 손으로 비를 가리다가 손을 내리고 이들처럼 그냥 걸었다. 비가 오고, 혼자라서 투어 예약도 안 되고, 예약했던 투어마저 취소됐다. 아쉬움은 물론 있지만, 화나지는 않는다. 왜 하필이면 내가 왔을 때 비가 오냐며 짜증 날 법도 한데, 짜증 나지도 않았다. 그냥 비가 오네. 이 정도다. 감정이 무뎌진 건지, 날씨가 좋아지길 포기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냥 내가 만든 감정소비를 하기보다 내리는 비를 멍하게 봤다.


이럴 땐 숙소에 누워서 과자 먹으며 영화 보면 딱인데. 빗소리가 더해져 때론 더 무서워지기도 하고, 더 나른해지기도 하니까. 가끔 생각한다. 여행을 왜 하고 싶은지, 여행 오면 왜 한국으로 가고 싶은지, 왜 힘들 때마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지. 여행 올 때마다 매번 다른 이유를 말했다. 백수지만 돈 많은 백수를 마음껏 즐길 수 있어서, 어떻게 살지 보다 뭘 먹을지 고민하는 순간들이 좋아서,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아서 등등 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 한 가지 이유가 더해졌다. 그리움이 그리워서. 나는 그리움을 찾아 여행하고, 미래에 찾게 될 그리움을 만들고, 현재를 그리워하는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그리움이 좋아서 여행하는 게 아닌가 싶다.


뒹굴거리고, 밥 먹고 카페 가는 일은 여행이나 한국이나 다른 바 없는 일상이다. 다만 거리의 분위기나 공기, 사람, 문화가 다르다. 높은 건물보다 낮은 건물들로 해가 뜨고 질 때 낭만스러운 하루를 맞이하고 보내주기를 반복할 수 있는 일상. 조용히 일해야 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매장 음악에 맞게 따라 부르며 춤추는 직원, 마사지하면서 눈을 일몰을 보는 직원까지. 같은 하루지만 다른 마무리를 하면서 보내는 순간들이 그립고, 그리움이 그리워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하지만 친구들이나 가족과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친구와 가족이 그립고, 강아지를 보면 우리 집 강아지가 보고 싶다. 그렇게 또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게 된다.


사실 매일 지는 해다. 별거 없다. 그냥 하루가 간 것뿐이다. 하지만 우린 여러 의미를 둔다. 벌써 지나버린 오늘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오늘이 지나 내일을 기대하기도 한다. 매일 지는 해지만 매일 다른 해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 아닐까? 우린 어쩌면 어제보다 나은 하루였길 바라며 하루를 보낼 준비를 하는 걸지도. 지나간 해를 본적은 많아도 지나갈 해를 기다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수 있고, 생각보다 그 이상을 볼 수도 있다. 한 치 앞을 몰라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지만.


매일 해는 지는데, 일몰을 보는 목적으로 여기에 오니 일몰이 새삼 특별해 보였다. 한 가지 관심사를 얻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걸로도 충분한 채로.


여행의 실감은 언제 오는 걸까. 현지인을 만나면서? 우리 집이 아닌 숙소에서 지내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감은 찾아온다. 그래서 우린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지만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일몰을 보러 왔고, 그중 하루는 주황빛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온 세상이 주황으로 바뀐 건 아니지만, 하늘의 주황빛에 반사되어 바다도 주황색으로 변하는 황홀함은 잊을 수 없다. 내 주변만 로맨틱하게 바뀐 것만 같았다. 아쉽게도 다음날은 비가 많이 와서 해를 볼 순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떠나온 것 자체로 만족한다.


짧게 여행하든 길게 여행하든 한국으로 돌아갈 때는 조금 달라진 걸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나만 변한 것 같다. 익숙했던 것들이 새삼 다르게 보이고, 좀 더 하늘을 유심히 보게 된다. 그 기분이 좋다. 돌아갈 집이 있고, 그 길을 걸으며 보이는 익숙한 풍경을 보며 안심하는 순간들이. 새벽에 도착해서 다들 출근할 시간에 나는 집으로 퇴근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약간 탄 얼굴을 하며 집으로 왔다. 그래도 다음엔 우기를 피해서 일몰 보러 와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코타키나발루 현지인 맛집을 발견하고 시내를 걸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