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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Jan 20. 2020

엄마와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어요.

강릉 1박 2일


엄마와 강릉으로 여행을 갔다. 여러 번 여행 가자고 했지만, 쓸데없는 곳에 돈 쓰지 말고, 적금이나 하라며 매번 거절당했다. 안정적이지 못한 내 삶이 엄마 눈에도 위태로워 보였나 보다. 하지만 이번엔 내 생일이라 그런지 바로 알겠다고 하셨다. 평소 같았으면 "생일인데, 친구랑 놀지 왜 나랑 여행가?"라고 물었을 거다. 난 그 대답에 맞게 설득할 예상 시나리오를 계획했기 때문에 승낙이 조금 얼떨떨했다. 어찌 되었건 처음으로 엄마와 여행을 간다.


어디 가고 싶어?
아무 데나



엄마는 국내 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말했다. "여수 안 가봤는데, 부산도 안 가봤고" 무의식으로 했던 말이라 진심이었을 텐데, 바쁘다는 핑계로 못 들은 척했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어디를 가야 할지 망설였다. 엄마가 평소에 말했던 여수, 부산, 강릉, 완도 등의 지역을 나열했다. 엄마는 끝까지 어디든 상관없다고 했지만, 결국 해돋이를 보자며 강릉을 선택했다. 아침 10시에 서울역에서 만나 KTX를 탔다. 엄마는 우유 2개와 물을 사서 내게 건네주었다. 기분이 어떠냐고 묻기도 전에, 엄마의 입가에 미소가 있었다. 그 미소를 보니 더 미안했다. 바쁘지도 않고, 사실 돌아다니는 게 귀찮았을 뿐인데.


안정적인 직장보다는 하고 싶은 걸 찾겠다며 위태로운 삶을 살았다. 마음에 드는 직장도 실제로 다녀보면 다른 회사와 별 다를 게 없었고, 계속 적응하지 못 한채 사회 부적응자로 지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내가 먹고 싶은 음식도 포기해야 했고, 엄마에게 옷이나 맛있는 것도 사주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아끼지 않고 모든 걸 펑펑 쓰고 싶었다. 나만큼이나 불안했을 엄마에게 나도 이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기다리는 것과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무릎이 좋지 않았고, 음식을 먹기 위해 오래 기다리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가장 걱정됐다. 나는 엄마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고 싶고, 아무거나 상관없는 엄마와의 갈등이 말이다.  


강릉에 왔으면 초등 순두부를 먹어야 한다. 나는 순두부를 좋아하지 않지만, 엄마는 순두부, 청국장 등의 음식을 좋아하신다. 다른 음식점을 몰라도 여기만큼은 꼭 같이 가고 싶었다. 평일이라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어디 가든 대기줄이 많았다. 슬쩍 엄마 눈치를 보며 괜히 "얼마나 맛있으면, 근데 다른데 보다 여기가 별로 줄이 없네, 넓어서 금방 먹겠어" 등의 말을 꺼냈다. 엄마는 "의자가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려서 먹자. 금방 줄겠네"라고 말했다. 말 한마디에 등줄기에 땀이 흐를 것만 같다. 해가 따스웠고, 별로 춥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초당 할머니 순두부에서 순두부백반을 주문해서 먹었다.



파도를 자세히 보는 게 처음인 것 같아


강릉 시내를 둘러볼 겸 길을 따라 강문해변에 갔다. 시원하게 파도가 쳤다. 엄마는 그 파도를 보며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쉴 틈 없이 일만 하느라 엄마의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매일 여행 다니고, 하고 싶은 걸 말하는 나와 달리 엄마는 세상이 재미없다며, 자신의 삶을 미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팔자려니 하면서 지냈는데, 지내고 보니 자신만 손해였다며 앞으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곳만 여행 다닐 거라 다짐하셨다.


엄마에게 포즈를 요청하며 사진 찍으려 했다. 내가 사진 찍을 때 어색한 미소와 포즈가 엄마를 닮은 듯했다. 자연스러운 사진을 찍기 위해 가짜 웃음과 머리카락 만지는 설정을 요청했다. 그러다 귀찮아졌는지 계속 찍으려는 내게 그만 찍으라고 하셨다.  "사진 찍으면 너무 늙어서 보기가 싫어. 안 예쁘고" "뭐래, 예쁘기만 한데"



엄마의 최근 관심사는 역사이다. 설민석 선생님의 강연과 도서를 읽으며 취미로 역사를 공부하고 계신다. 그래서인지 오죽헌과 같은 역사적 장소를 좋아하셨다. 나보다 앞서서 건물마다 적혀있는 글을 읽으며 천천히 오죽헌을 둘러보셨다. 오죽헌은 지폐 5천 원권과 5만 원에 새겨진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이 태어난 곳이다.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어제각이 있고, 벼루 뒷면에는 정조가 율곡 이이를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사랑채, 안채 뒤로 펼쳐진 대나무 풍경과 한옥의 운치를 느낄 수 있다.



강문해변이 보이는 세인트 존스 호텔을 예약했다. 연말임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객실을 얻을 수 있었다. 방의 온도는 적절했고, 생각보다 좁지 않고 쾌적했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엄마는 베란다 문을 열었다. "딸 덕분에 제대로 호강하네" 바람이 꽤 물어서 베란다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호텔은 비싸잖아, 게스트하우스 예약하지. 근데 침대 되게 푹신하다" 호텔은 처음으로 묵어서 인지 냉장고와 화장실을 보며 좋다는 말을 반복하셨다. 이런 말과 행동 덕분에 기뻤다.



짐을 풀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일몰이었다. 엄마가 잠시 호텔에서 쉬고 있는 동안 근처 동네서점 참깨 책방 깨북에 갔다. 걸어서 약 15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점점 어두워졌지만, 온통 붉은빛이 되는 하늘이 예뻤다.



깨북 서점은 독립 서적부터 소설, 그림책 등 종류가 다양했다. 사장님의 취향이 담긴 책이라 왠지 더 꼼꼼하게 책을 살펴보게 된다. 여행 오게 되면 서점에서 책을 구매하는 습관이 생겼다. 깨북에서는 여행 사진집을 구매했다. 사장님은 깨가 담긴 작은 통과 책을 함께 주셨다. 친절한 웃음과 한적한 공간과 있는 책방이었다. 저녁엔 강릉시장에서 회를 구매하고, 호텔 근처 오빠닭에서 치킨을 사서 먹었다. 강릉시장에도 대기줄이 많아서 엄마의 눈치를 보고, 조금 싸우기도 했지만, 먹으면서 풀었다. 싸우지 않는 게 이상하긴 해.



겨울이라 일출 시간이 늦긴 해도 일어나는 건 역시 힘들다. 특히 어제 엄마가 생각보다 꽤 걸었기에 다리가 부어있었다. 결국 밖으로 나가지 않고 호텔 안에서 해를 기다렸는데, 흐른 날씨 탓인지 해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머문 객실 반대편에선 일출이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든 구름은 볼 수 있었다.


해돋이 보러 온 여행이고, 엄마에게 제대로 보여드리지 못해서 아쉬워하고 있을 때 엄마는 "괜찮아.  쉬어서 너무 좋아"라고 오히려 나를 다독였다. 여행이 계획대로 되지 않음을 잘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 맞게 만족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 엄마와 떠나는 여행에서는 그러기 쉽지 않다. 완벽한 여행이란 없을 수밖에 없는데. 조식 먹고 짐을 챙겨 경포대에 갔다.



경포대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일출로 유명해서 그런가? 우린 잠깐 그곳을 구경하다 경포 가시연 습지 생태공원을 걸었다. KTX 시간이 3시 30분이라 그 사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테라로사로 갔다. 할머니 동네와 비슷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여러 말을 이어갔다. 나는 엄마가 궁금하다. 엄마의 젊은 시절, 내 나이 때 어떻게 지냈는지. 하지만 엄마는 늘 별거 없다며 들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 얘기를 꺼내면서 자연스럽게 물어야 한다. 엄마는 북적거리는 도시보다는 이곳처럼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좋다고 하셨다. 그 점도 엄마랑 나랑은 참 닮았다. 많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지만,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들어야지.


엄마와 여행 온 사람은 나밖에 없어 보였다. 엄마는 다 친구랑 오는데 왜 자꾸 나랑 여행 오려고 하는지를 물었다. 그냥이라고 답했지만, 사실 엄마에게 여행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익숙해서 잘 느끼지 못했는데, 사진으로 보니 엄마도 나처럼 빠르게 늙고 있었다. 그동안 엄마가 본 세상을 내게 보여줬다면 이젠 내가 본 세상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다.


아빠 빼고 엄마랑 둘이 온 여행이라 엄마가 마음이 좀 쓰였던 것 같다. 아빠가 좋아하는 맥주 안주 오징어와 쥐포를 잔뜩 사서 강릉역으로 갔다. KTX에서 엄마는 좋아하는 드라마를 봤고, 나는 어제 구매한 여행 책을 읽으며 집으로 갔다. 부모님과 여행 갈 때 흔히 들었던 주의사항이 있다. 잘하려고 하는 마음과 잘하지 않아도 되는 부모님과의 갈등이 있을 수 있으니,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식사 시간만 놓치지 말라고. 그 말을 계속 되새기며 시간 체크하려 애썼지만, 욕심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내가 부족하여 아쉬운 여행은 아니었나 씁쓸해하고 있을 때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1박 2일 동안 너무 재밌었고, 고마웠다.
엄마가 너무 신경질 내고 짜증 낸 것은 미안하다.
처음 간 강릉 구경은 좋았어


엄마는 글을 보낼 때 많이 쓰고 수정한다. 그런 엄마를 알기 때문에 너무 감사했다. 다툼은 있었어도 다음 여행에는 애써 맛집을 찾지 않고, 배려하며 즐기면 된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좋다. 앞으로도 더 넓은 세상을 엄마와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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