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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Apr 13. 2021

알지만, 모른 척해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얼마 전에 슬라이드 필름을 맡겼다. 빈티지라 잘 안 나올 수 있다는 말에 기대하지 않고 봤는데 생각보다 좋았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따뜻하달까. 사진들을 나열하니 주로 건물과 사람 뒷모습이 많았다. 다시 말하면 삶의 흔적이 보이는 건물과 살아온 무게를 보여주는 뒷모습을 찍었다. 이 사진은 등산하다 쉬고 있는 아빠 뒷모습이다. 몇 달 전, 아빠가 크게 다쳤다. 현장에서 잠깐 딴생각하다 기계에 손이 끼었던 것. 한순간에 아빠에게 장애가 생겼다. 생각보다 무덤덤한 아빠를 보며 걱정하기보다 화가 났었다. 왜 조심하지 않았던 걸까 하면서.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타까웠고 무언가 짠했다. 아빠도 다치고 싶었던 건 아닐 텐데. 장애란 선척적인 경우도 있지만 후천적인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우리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긴 휴식을 마친 뒤 출근을 앞두고 있는 아빠와 함께 등산을 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손가락을 가리는 아빠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색한 아빠 포즈를 놀리거나 아빠가 찍어준 사진 보며 “사람을 5등신으로 만들었네?”라고 같이 웃는 일밖에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밖엔. 아빠는 다친 손 때문에 바뀐 업무에 대해 고민했다. 이 역시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들어주는 일밖엔 없었다. 멋있게 “내가 생활비 줄게, 일 하지 말고 쉬어”라고 말하지 못하는 내 현실에 씁쓸했고, 아빠 나이가 되어도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기운 빠졌다. 나는 이 사실을 알지만, 모른척하며 살아야 한다. 각자의 삶이지 않냐며 합리화하고 나도 내 삶을 살아야 한다. 생략된 말속에서, 고요한 시간 속에서 각자 많은 생각을 했겠지만, 서로에게 전하지 않았다.


서로의 안부를 말로 하지 않고 이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이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래도 부모님이랑 여행하는 건 힘들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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