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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Sep 23. 2021

로맨틱했던 여수 밤바다, 나 잘 살고 있었구나

드라마 <알고 있지만>을 보는데 바다가 너무 예뻤다. 마음만 먹으면 매일 인천 바다를 볼 수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조금 멀리 떠나고 싶기도 했고, 다른 색감의 바다를 보고 싶기도 했다.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바다와 달리 여수 바다색은 청량했고, 동네 분위기는 포근해 보였다. 바로 비행기를 예약했다. 혼자 조용히 가기보다 뭔가 떠들썩하고 요란하고 싶기도 해서 친구와 같이 떠났다.



저기 조금 부끄러운데... 조용히 해주겠어?

용산역에서 ktx를 탔다. 처음 ktx를 탄 친구는 여기저기 구경하며 두리번거렸다. 들뜬 마음에 잠 못 든 시간을 충전하기 위해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예전 같으면 피곤해도 바깥 풍경 보기 바빴을 텐데, 요샌 그 순간을 집중하며 즐기는 편이다. 졸리면 자고, 그렇지 않으면 풍경 보며 멍 때리거나 생각에 잠기는 그런. 매일 봐도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지만, 언제 봐도 낯선 그 마음을 남겨두고 싶기도 하고. 그래야 다음에 와서도 새로울 수 있으니. 여수에 다 와갈수록 초록색 풀들과 시골 풍경이 보였다. 회색빛 풍경만 보다가 가끔 이런 풍경을 보면 눈이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여수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특유 바다 비린내가 났다. 나지막이 말했다. "바다 냄새" 그 냄새를 따라 길을 걸으니 진짜 바다가 보였다. 10년 전에 갔던 여수와는 너무 다른 느낌. 많이 발전하기도 했고, 여전히 한적하기도 했다.



뜨거운 햇빛과 무거운 짐에 못 이겨 숙소로 갔다. 여행 갈 때마다 숙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브랜드 호텔을 찾아보기보다 그 지역에만 있고, 이번 여행의 서사를 품을 수 있는 숙소에서 머물고 싶달까. 그렇게 예약한 한옥호텔은 바다가 보이는 숙소였고 나무 냄새까지 났다. 좋다. 떠나는 것만으로도 그저 좋은 것인지,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유가 좋은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마냥 좋았다.



여행 가면 꼭 먹어야 하는 맛집, 음식이 있다. 다행히 나와 친구는 그런 걸 따지는 편은 아니다. 몇 시간 줄 서서 기다리며 먹기보다 배고픔을 빠르게 채울 수 있는 맛집 옆집을 선택하는 쪽이랄까. 걸어가다 보이는 햄버거 집에서 배를 채우고 본격적으로 바다로 떠났다. <알고 있지만> 여주인공 나비가 마음이 힘들어서 도망친 곳이 만성리검은모래해변이다. 택시 타고 달리다 보니 조금씩 바다가 보였다. 시야가 환해지면서 바다밖에 보이지 않은 곳에서 내렸다. 바닷물에 들어가 물놀이하는 사람도 있었고, 잠자리채로 물고기 잡는 아이도 있었다. 갈아입을 옷과 수건은 없지만, 치마를 살짝 걷어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은 차가웠고 파도는 거칠었으며 내가 밟은 모래는 미끄러워서 가만히 서있으면 모래 속으로 들어갈 것만 같았다. 어린아이처럼 파도가 올 때마다 "아악"하고 소리치며 웃었다. 발에 모래가 붙었다. 잠깐 계단 의자에 앉아 발을 말렸다. 그 시간 동안 우리보다 더 신나게 노는 방법을 아는 아이들을 봤다. 우리처럼 파도를 따라갔다가 피했다가를 반복하거나 아빠와 함께 물싸움하며 노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싱그러운 아이의 웃음은 기분이 좋아진다. 양말로 발에 묻은 모래를 털고 물을 닦아냈다.



<알고 있지만> 촬영지 앞까지 걸어갔더니, 아까 보던 바다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잔잔하고 한적했다. 사람은 없었으며 파도도 약했다. 스킨스쿠버 하거나 낚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주변에 앉아 파도를 봤다. 여행 올 때마다 생각하는 것 같다. 왜 여행을 하고 싶을까, 왜 하필 이곳일까. 바로 답이 생각날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여기는 드라마 속 바다가 너무 예뻐서 떠나온 곳이다. 물론 날이 흐려서 색감이 같다곤 할 순 없었지만, 바다는 어떤 색을 띠든 기분 좋게 하는 힘이 있으니 괜찮다.



골목골목을 걷다가 시골 할머니 집 이야기가 나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시골에 갈 일이 없어졌다. 예전엔 온통 초록빛 풍경과 특유 할머니 집 냄새, 나무 태우는 향이 마냥 신기하고 좋았는데. 시골 정서를 느낄 일이 없어서인지 골목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밭을 돌보고 자전거 타며 지나가는 모습이 정겨웠다. 우리 할머니 집은 지리산에 둘러싸여 있고 인근에 계곡이 있어 물놀이하기 좋았다. 1년에 한 번이지만, 그곳에서 놀면서 지냈던 기억이 있어서 다행이다. 동네를 산책하다 여수 해상 케이블카로 타러 넘어갔다.



케이블카 혹은 돌산대교 위에서 보는 일몰이 진짜라는 말에 고민하지 않고 바로 여행 코스에 넣었다. 케이블 카는 블루투스 연결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밤은 아니지만, 버스커버스커- 여수 밤바다를 틀었다. 음악을 들으며 돌산대교부터 바다, 도시를 봤는데 너무 예뻤다.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하니 지금 이 순간이 로맨틱해졌다. 비록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지만. 일몰까지 시간도 많고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오동도에 갔다.



오동도를 보니 10년 전에 걸었던 날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아 맞다. 이때도 이랬는데, 그대로네. 예전엔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한 번 갔던 곳에 또 간다 vs 새로운 곳에 간다' 그때 난 늘 새로운 곳에 간다를 택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한 번 갔던 곳에 또 간다를 선택할 수 있을 것 같다. 갔던 곳도 언제 가느냐, 누구와 왔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에. 숲 속이라 그런지 시원했고 계속 걸으니 덥기도 했다. 나무 틈 사이로 바다의 푸릇함이 보였다. 눈으로만 즐겼을 이 순간을 이곳저곳 카메라를 들이대며 기록했다. 취미로 유화를 배우기 시작하니 사진을 찍고 싶고, 사진을 찍으니 글이 쓰고 싶어 진다. 참 좋은 현상이다.



오동도에서 나오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조금씩 분홍빛을 보이더니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와"감탄사를 몇 번 남발하고 그저 멍하게 지는 해를 봤다. 예쁘다. 바다 끝쪽에 있던 오징어 배에 불이 켜지고, 오동도에 자전거 타며 가는 사람들, 우리처럼 일몰을 보는 사람들, 조곤조곤 사람들 목소리에 나긋해졌다. 로맨틱해. 갑자기 <갯마을 차차차> 김선호 대사가 생각난다. "누가 낭만에 불을 붙였네. 쓸데없이 예쁘게"



낭만포차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고 맥주와 소주를 시켰다. 간판에 들어온 불과 바다 위를 지나가는 크루즈, 저 멀리서 반짝이는 불꽃놀이까지. 이 순간을 로맨틱하지 않다고 할 수 없었다. 술이 계속 들어갈 만큼.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걸어 올라갔다. 짧지만 긴 여운이 있었던 바다를 보며 잔나비 <외딴섬 로맨틱> 카더가든 <로맨틱 선데이> 음악을 들었다. 드라마 한 장면 같았다. 음악으로 여행을 기억하기도 한다. 왠지 이 음악만 들으면 여수 밤바다가 생각날 것만 같다.


원래 오동도는 2일 차 일정이었는데, 1일 차에 떠나는 바람에 2일 차 일정이 변동됐다. 계획이 완벽해도 상황에 따라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다행인 건 이 계획의 변수가 좋다는 것. 2일 차에 자전거 타고 이순신광장에서 갓김치 사고, 갈치조림 먹고, 여수당에서 쑥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1일 차는 조금 부실했다면 2일 차는 든든했다. 버스 타고 무슬목 해변으로 갔다. 여행 올 때 여러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재미가 있다. 버스 타고 보는 재래시장, 동네, 돌산대교, 해변 등 풍경이 좋다. 그렇게 도착하니 먹구름 때문인지, 뉴스에서 곧 태풍이 도착한다는 말 때문인지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눈 뜨기 힘들 정도로.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해변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을왕리처럼 똥물이라 생각했는데, 보다 보니 연두색, 파란색, 녹색 등 다양한 색깔이 보였다. 이게 다 그림을 그린 덕분이다. 하나를 열심히 보고 있다 보면 진짜 다양한 색깔이 보이고, 그 색깔을 잘 관찰하고 표현할수록 사진과 비슷한 그림이 나온다는 걸 알게 해 줘서.


시간 맞춰 여수공항에 갔다. 뭘 하기도 애매해서 조금 이르게 출발했더니 한 시간 넘게 대기를 해야 했다. 원래 기다리는 걸 잘해서 인지 지루했지만, 그래도 시간을 잘 보냈다. 오랜만에 비행기를 탄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고, 21살 때 인도 여행을 떠나기 위해 공항 노숙했던 날도 떠올랐다. 그렇게 비행기 타며 하늘을 보는데 울컥했다. 지는 해를 보면서 시간이 흐름에 쓸쓸하다는 생각보단 그냥 이 순간을 보며 감탄하는 내가 너무 좋아서. 주책인가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뿌듯했다. 예전엔 불안에 영감을 얻었다면 요즘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영감을 얻는다. 구름까지 붉은색 빛으로 물든 모습을 보는데 문득 내가 잘 살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힘들다고 해도 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열심히 살았다. 힘든 순간에도 나름의 답을 찾아갔다. 그러다 지금처럼 어딘가 떠나고 싶은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밖으로 나설 때도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떠난 여행이지만)


그런 순간의 감정에 집중한 내가 좋았다. 오글거리고 낯간지럽기도 한데 정말 좋았다. 최근 뒤숭숭한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일몰 보며 내가 지나온 순간들을 하나둘 생각하니 나 자신이 기특했다. 늘 잘 살고 있었는지 의심했는데, 잘 살아오고 있었다며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난 정말 좋은 사람이었구나. 여기까지 오기란 쉽지 않았다. 그 쉽지 않은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내가 기특했나 보다. 바다를 보고 일몰을 보고 그 로맨틱한 순간을 보고 있는 나를 보며 뭉클했다. 그래서 이 날을 기록하고 싶었다. 이렇게 글로.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며 내가 느낀 감정과 경험을 흘려보내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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