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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Apr 10. 2022

찬란한 빛이 주는 황홀한 위로, 강릉 아르떼 뮤지엄

아르떼 뮤지엄, 경포호수 벚꽃, 안목해변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수학여행 편을 보자마자 강릉 버스를 예매했다. 바다 색감과 분위기도 한몫했지만, 바닷속을 뛰어들며 노는 그들의 웃음에 덩달아 즐거웠기에 바다에 가고 싶었다. 뭔지 모르겠는 무언가를 추억해 보고 싶기도 했고. 바다만 보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이라 욕심이 생겼다. 이번 강릉 당일치기 여행 목표는 아르떼 뮤지엄, 경포호수 벚꽃, 안목해변이다.


새벽 6시에 출발했는데, 11시 30분에 도착했다. 꾸벅꾸벅 머리 박치기하면서 많이 잤지만, 몸은 찌뿌둥했다. 정신 좀 깨울 겸 테라로사에 갔다. 이상하게 강릉에 오면 테라로사에 가게 된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 뜯지 않은 서적, 높은 층고, 직접 로스팅하여 맛있는 커피까지. 여유로워지는 기분에 커피 한 잔으로 여행을 시작하곤 했다. 테라로사에서 아르떼 뮤지엄까지 걸어가는데 벚꽃이 보였다. 아직 환하게 만개하진 않았지만, 거리는 온통 분홍빛이었다.


네이버 예매로 사전 예약하니 주말이어도 빠르게 입장할 수 있었다. 단, 예약 후 한 시간 뒤에 입장할 수 있으니 입장 시간을 고려해서 예매해야 한다. 티켓을 출력해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너무 어두웠다. 어딘가를 잡고 걸어가야 할 것만 같았다. 본 입구를 찾지 못해 어리둥절하다 글씨의 빛을 따라 천막을 걷어내니 꽃으로 물든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꽃이 흩날리고 있었고 그 위에 별이 떨어지고 반딧불이 날아다녔다. 마치 내가 개미만큼 작아져 꽃과 풀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모습을 비춘 거울 속에도 꽃이 있었다. 황홀했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배경이 검은색이라 꽃이 피는 과정과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꽃으로 치장한 사슴과 용맹한 호랑이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다들 사진 찍기 바빴다. 실사와는 또 다른 기분. 미디어 아트로 동물을 표현하니 눈앞에 있는 듯 선명했다.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하지 않더라도 카메라를 켜게 된다.



전등이 꺼졌다가 갑자기 켜지고 비슷한 톤의 불빛이 만나 로맨틱하게, 차갑게, 환하게 주변을 비췄다. 하늘로 올라가는 등불 사이에 있는 기분에 자꾸만 두리번거리게 된다. 불빛과 색감은 참 신기하다. 어두운 도심 위를 달리는 차량 불빛, 늦은 시간까지 켜진 사무실 불빛, 잠들 시간에도 바쁘게 돌아가는 공장 불빛을 보며 위로받았다. 밤낮없이 켜진 불빛이 누군가의 업무가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이런 사실을 떠나 찬란한 불빛이 별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그 기분을 여기서 느낄 수 있었다.



들여다보지 않아서 몰랐던, 가까이 갈 생각을 하지 않아서 볼 수 없었던 자연을 보는 기분이다. 시각과 청각을 간지럽히니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보고 싶어 졌다.



초등학생 때 손가락 마디 정도의 크기로 번개를 그렸다. 그러다 시골집에서 길게 내리치는 번개를 보고 번개가 작지 않다는 걸 알았다. 자세히 보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될 때가 있다. 폭우와 함께 무섭게 치는 파도와 매서운 목소리로 자신을 알리는 번개의 웅장한 소리에 괜히 위축됐다. 작은 공간에서 빛과 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이 더 위대해 보였다.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오래 머물렀던 정원 파트. 공간의 이해, 음악의 어울림, 작품의 이야기, 불빛의 아름다움이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아리랑이 울려 퍼지면서 하늘 위로 올라가는 등불과 비처럼 쏟아지는 별, 묵묵히 돌아가는 풍차와 바람과 따스함이 느껴지는 분위기까지. 모든 게 좋았다.



예전에 별을 보고 싶어서 몽골로 여행을 갔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별을 봤는데 이상하게 별 감흥이 없었다. 내가 생각한 만큼의 황홀함이 아니어서일까. 보고 싶은 별을 봤으니 목표가 사라졌다는 쓸쓸함 때문해서였을까. 뭔지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아쉬웠다. 그땐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아르떼 뮤지엄 등불과 별을 보고 알았다. 내가 상상한 환상은 현실 속에서 찾기 어렵다고. 그럼에도 어딘가에 존재할 황홀함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고. '환상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거야'라고 말해주는 예술로 우린 계속 희망과 환상을 계속 좇는다고.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 보기' 목표를 지웠는데 이번에 그 목표를 다시 썼다.


클래식이 바뀌자 강릉에서 유럽 미술관으로 이동했다. 미술책 혹은 미술관에서 잠깐 봤던 작품이 살아 움직이니 쓸쓸함, 낭만, 고난, 찬란함을 한순간에 느낄 수 있었다. 큰 화면으로 보니 작품의 이야기가 더 잘 보였다. 그래서 그림 속 이야기를 따라가는 기분이 들었던 걸까. 1시간 30분 정도 있으려 했는데, 3시간 정도 머물렀다. 예약한 버스 시간만 아니었어도 하루 종일 머물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좋았다.


안목해변. 강릉 바다는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고 푸를까. 마음만 먹으면 인천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는데, 우리 집 근처에서 보는 바다 색이랑 너무 다르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는 거겠지. 맑은 바다를 보고 싶어서. 가만히 앉아서 바다만 봤다. 이직하여 4월 말에 새로운 회사로 출근한다. 2년 동안 다녔던 직장에서의 힘듦, 고난, 재미, 설렘 등의 다양한 감정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에 앞서 무언가의 다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별생각 없이 바다만 봤다. 다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 아무리 생각한들 내가 받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을 텐데. 생각하는 게 귀찮아져 이내 생각을 멈추고 바다만 봤다. 아무 생각 없이.


매번 여행을 마치면 "그래! 이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어!"라는 다짐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번엔 그런 다짐을 접어뒀기에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출발했을 때처럼 머리 박치기를 하다 눈을 뜨니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됐다. 아르떼 뮤지엄 속에서 봤던 어둠 속 불빛이 현실에도 있었다. 차량, 건물, 가로등. 황홀하진 않았지만, 있는 그대로로 우리에게 작은 영감과 위로를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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