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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Jun 14. 2021

템플스테이 하면서 보고 들은 것들

양평 용문사 템플스테이


함께 있을 때 편한 친구가 있고, 함께 있을 때 불편한 친구가 있다. 내가 이런 말 하면 저 친구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 관계를 유지하려면 이렇게 해야 하나? 함께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하나하나 계산하면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모든 사람이 편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 편함의 대상엔 내가 없었다. 분명 친구와 같이 있는데, 이상하게 피곤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그때 알아챘던 것 같다. 우린 건강한 사이가 아니구나. 그 이후로 편한 친구만 찾았다. 내가 희생하지 않아도, 내가 뭘 하지 않아도, 본래 내 모습 그대로로 지낼 수 있는 친구들만. 친구는 줄었고, 진짜 친구는 선명해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가 있다. 대학교를 입학하면서 사는 곳과 전공이 달라지면서 연락 횟수가 줄었다. 몇 년 동안 연락하지 않던 우리는 우연히 연락이 닿았고, 매일 봤던 친구처럼 잘 지냈다. 가끔 진지한 얘기를 했고 자주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소주잔만 부딪히고 아무 말도 안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공백도 대화의 연장이 되어 또 다른 대화로 이어졌다. 내가 잊고 싶고, 때론 오랜 시간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엔 모두 친구들이 있었다.



이번엔 이 친구들과 양평 용문사에서 템플스테이 하러 왔다. 주변에서 "왜 갑자기 템플스테이?"라고 묻던 사람도 있었다. 우린 뜬금없고 즉흥적인 감정에 잘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가고 싶다는 생각에 바로 예약하여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우리가 떠나는 날 고구마 태풍이 온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거리는 조용했고 햇빛은 뜨거웠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사찰을 한 바퀴 돌았다. 사람들은 11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 앞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그림 같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모양 자체가. 오랜 시간을 머금으며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형태를 보면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게 된다. 비록 1박 2일 이곳에 있지만, 나무 앞에서 내 근심 걱정을 묻어두고 싶다. (집에 가기 전에 소원 반지를 사서 나무 앞에 소원을 빌고 왔다. 무교인데 이런 건 믿고 싶다. 그럼에도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같은)  



사무실에서 바지, 조끼, 고무신, 모자를 받고 사찰로 들어갔다. 아늑한 공간이었다. 회색빛 건물 속에 살고 그런 공간에만 머물다 보니 이런 풍경 자체가 낯설고 좋았다. 가만히 있으면 새소리와 까마귀 소리,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으며 코 끝을 스치는 향긋한 풀내음까지 났다. 사찰 올 때 핸드폰을 보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렇게 되면 심심할까 봐 책을 챙길까 하다가 놓고 왔다. 아무것도 안 할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뭔가 해야 할 거리를 들고 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니까. 덕분에 눈은 피로하지 않았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시간이 흐르는 걸 천천히 지켜봤다. 회사 생활할 때는 벌써 2시야? 벌써 5시야? 하면서 '벌써'라는 단어가 습관처럼 붙었다. 반면 여기에 머무는 동안엔 '아직'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아직 4시네. 아직 4시 10분이네. 내가 바쁠 때는 모든 게 빠르게 지나갔는데 내가 여유로우니 모든 것들이 천천히 흘러갔다.



이렇게 생생한 지금도 한때가 되어 잊어질 순간이라 생각하니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싶었다. 필름 카메라로 내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담았다. 난 무소유 할 거라며 여기 있는 동안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속세에서 벗어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진 속에 다 담으려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소유욕이 대단하네?라고 놀렸다.



5시 30분이 되자 사람들은 잔디밭으로 모였다. 스님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주셨고, 사찰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셨다. 불교를 잘 몰랐기에 설명은 어려웠지만 괜찮았다. 우린 배우러 온 게 아니라 머물기 위해 온 거니까. 사찰 투어가 끝나고 식당으로 갔다. 음식을 남기면 다음 생에 소로 태어난다는 말에 내가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담았다. 부족하면 더 먹으면 된다. 식당 안에는 묵언으로 오로지 밥 먹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천천히 씹으며 나물의 양념을 음미하고, 심심하고 짭조름한 반찬을 먹었다. 기대한 만큼 절밥은 맛있었다. 다 먹고 내가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고 나오자마자 친구들끼리 "대박이다..."라고 감탄했다. 매일 고기만 먹다가 고기 없는 나물반찬을 먹었다. 맛있었다. 건강해지는 느낌도 있었고 진짜 불교를 체험하는 기분도 들었다. 먹고 잠깐 계단에 앉았다. 바닥에 쉬고 있는 나비들도 있었고, 땅을 빠르게 이동하는 개미도 있었다. 예전 같으면 놀라거나 자리를 이동했을 텐데 가만히 앉아서 그 곤충과 벌레를 봤다. 나에게 해가 되지 않다는 걸 알기도 했고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불교의 뜻을 따르고 싶었다.



밥 먹고 시간이 남아 절에 있는 차를 마셨다. 차 마시는 방법이 쓰여있긴 했는데, 누군가가 타주는 커피에 익숙해진 우리는 만드는 거 하나하나 버벅거렸다. 그렇게 겨우 만들었더니 맛있기는커녕 떫었다. 우린 차 한입 맛보고 서로를 쳐다봤다. 떫음에 나도 모르게 인상 쓴 표정이 나왔고 우린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문을 살짝 열어놓으니 바깥 전망이 보였다. 틈 사이로 개미가 기어 다녔고 밖에선 까마귀 두 마리가 대화를 나눴다. 밖은 너무 더운데 실내는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시원했다. 나른하다.


우린 마신 차를 정리한 뒤 스님 말씀이 담긴 CD를 들으며 108배를 시작했다. 처음엔 이렇게 절하는 게 맞는지 자세에 신경 쓰였고, 그다음엔 절하는 나 자신이 신기해서 살짝 웃었으며 그 이후부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할까 생각했다가, 그런 생각도 잊고 내 몸이 저절로 절하고 있을 때 스님의 말씀이 들렸다. 내 모든 잘못을 사죄하기 위해 절을 하고, 내 욕심을 버리기 위해 절을 한다는 말씀. 숫자를 세지 않아서 108개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들이 하나 둘 일어나는 타이밍에 맞춰 나도 108배를 마무리했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됐고 걸을 때마다 다리가 아파서 절뚝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방으로 들어가 선풍기 바람 쐬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108배하자고 한 사람 누구야? (나다)


7시 30분에 스님과 캠프파이어 프로그램이 있다. 시간이 되니 방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왔다. 대가족, 가족, 혼자, 친구, 연인 등 다양한 사람이 모였다. 각자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요즘 삶의 낙은 무엇인지 대화를 이어갔다. 어떤 사람의 고민은 내가 이미 했던 고민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의 고민은 내가 하지 않은 고민이기도 했다. 내 또래는 대부분 고민이 없어 보였다. 지금을 만족하며 템플이 좋아 오게 됐다는 사람들. 사람들 이야기도 듣고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을 보며 멍도 때렸다가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별을 보며 감탄하기도 했다.



10시가 되면 템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전까지 산책하거나 멍 때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가령 이런 것들. 나는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 큰 불안도 걱정도 없다. 하고 싶은 일을 잘하기 위해 꾸준히 글 쓰고 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조차도 좋다. 적당한 안정감이 찾아올 땐 새로운 일, 취미, 운동으로 내 흥미를 잃지 않으려 작은 변화를 줬다. 예를 들어 올해는 필름 카메라 사진전을 해보자! 그동안 늘 위축되어있었고, 뭐가 맞는지 모른 채 불안하게만 살아왔던 것 같다. 잘 살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했고, 책을 읽으며 답을 찾으려 했다. 그 결과 나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내가 힘들어할 때 조언해준 사람이 많았다. 이론적으론 공감했으나 마음에 와닿지 않았던 건 내 일이 아닌 다른 사람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행동으로 옮기려면 용기가 필요하기도 했고 현실적인 고민에 포기할 상황도 있었다. 그래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결과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게 됐고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찾아가는 과정을 즐기게 됐다. 여유로워졌다. 즉 지금 하고 있는 한 가지에만 집중하면 된다. 밥 먹을 땐 밥을 먹고, 차를 마실 땐 차를 마시고, 멍 때릴 땐 멍을 때리면서. 넋 놓고 있는데 갑자기 이 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 뒤로 멍을 때리지 못한다.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일은 꽤나 어려운 법이다. 그 어려운 일을 조금씩 해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예불드리고 일출 보러 올라갔다. 안개가 자욱하여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었다. 바다 같았다. 내 눈에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전망을 망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도 하나의 그림이 되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조금씩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건 마음껏 하고, 내가 싫어하는 행동은 애써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렇다고 이기적일 순 없다. 즉 내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은 상대의 피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한다.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행복할 것 같은 선택을 하려 한다. 그 선택엔 불안도 따를 테고, 잡생각도 붙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것 같으면 그 선택을 하고 싶다. 템플스테이 하면서 할 게 없으니 생각을 많이 했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내가 잘 살고 있음이 명확해졌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까지 건강해지기 위해 앞으로도 이런 시간을 종종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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