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 괜찮아" 의 아무거나

숨은 그림 찾기 같은 부모님들의 아무거나

by Melody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숨은 의도를 찾으며 커 왔다. 숨은 그림 찾기, 숨바꼭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어렸을 때 놀던 것들을 생각해 보면 뭐 그렇게 숨겨진, 미세한 것들을 많이 찾아야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길러진 숨은 의도 찾기의 실력은 성인이 돼서도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회사에서는 회식을 앞두고 ‘아무거나 다 좋다. 팀원들 먹고 싶은 걸 먹자’라는 부장님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느라. 그래도 이건 레벨 1단계. 2단계는 연애를 하면서 찾아온다. 부장님보다 방어력 높은 연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지, 의도가 있는지 가늠해야 되는 ‘아무거나’ ’됐어‘ ‘괜찮아’ ‘몰라?’ 등의 공격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아차’하는 순간 의도를 파악할 기회조차 놓치기 때문에.


그래도 나름 사회생활도 오래 하고, 적지 않은 연애 기간으로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건 자신이 있었지만 결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결혼 준비 7개월 차 남자친구의 ‘아무거나’는 편하게 쓰루 하면 된다. 처음에는 모든 예비부부가 겪는 과정을 우리도 겪었다. “이 결혼 나만 해?” “너는 결혼에 관심이 없니?” “넌 결혼 안 하고 싶어? 왜 나만 준비해?” 수도 없이 싸우고 서운했지만 결혼이 가까워질수록 남자친구의 의견은 그다지 필요가 없어진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내가 찾아보기 전에 빨리 말해주면 땡큐. 어차피 여자가 준비를 해야 하는 결혼시장에서 남자 친구는 내가 했던 말을 잘 기억하고 있으면 베스트, 시키는 거 기한에 맞춰서 잘해오면 나름 선빵, 태클 안 걸면 평균은 하고 있는 거다. 그럼 결혼을 준비하며 듣는 ’아무거나‘는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궁금할 텐데, 결혼 준비를 해 본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할 시부모님의 ’아무거나‘다.


돌이켜서 생각해 보자. 나의 엄마, 아빠의 ‘아무거나’를 알아 차리는데도 30년이 걸렸다. 우리 부모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오랜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어렸을 때는 자식이 좋아하는 걸 선택하도록 아무거나라고 얘기하셨고, 조금 커서는 자식들이 부담이 될까 봐 아무거나라고 얘기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이런 부모님의 마음 한 켠에도 원하는 건 명확하게 있다. 그저 부모님의 숨은 의도와 마음을 알아차리기까지 우리가 크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데 남의 부모님의 ‘아무거나’는 어쩌면 좋냐고….. 시부모님의 ’아무거나‘의 숨은 뜻을 한 번에 캐치하는 남자친구는 세상에 없다. 어떤 남자가 그랬다면 그 남자와 결혼하는 여자는 커뮤니케이션 스킬 상위 1% 남자를 잡은 거다. 시부모님이 ’아무거나 다 좋아‘라고 하셔서 남자친구에게 물어보면 십중팔구 ’우리 엄마는 진짜 아무거나 다 괜찮아‘로 해석한다. 이때부터 여자는 비상에 걸린다. 시부모님과 시간을 보낸 적도 공유할 경험도 없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남자친구 기억 저편의 정보를 긁어모은다.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스타일로 입으시는지, 시간을 어떻게 보내시는지 등등 뭐라도 좋다. 우리는 그렇게 긁어모은 기억으로 어떤 선물을 할지, 어느 식당을 갈지 아무거나의 정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첫인사를 드리러 갈 때도 남자친구에 물었다.


“어머니 꽃 좋아하셔?”

“엄마 꽃 안 좋아할걸?”

“꽃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럼 무슨 색 좋아하셔?“

“음… 아무거나 다 좋아할걸?”

“빨리 생각해 내”

“음… 빨강..? 모르겠는데…“


이래서 아들 키우는 거 아니라고 하는 걸까. 뭐 그래도 내가 뭐 좋아하는지 알고 찰떡 같이 해주니까, 그걸로 만족한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시어머니 아들의 답변을 무시한 채 임영웅을 좋아하신다는 정보를 기반으로 파란색 수국과 빨간 장미를 섞어서 마치 태극기 같은 꽃을 준비해 첫인사를 드렸다. 빨강 옷을 입고 오신 어머니. 아들은 아들인가 보다. 아예 모르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꽃을 받고 울 것만 같은 어머니의 표정은 잊을 수가 없다. 아들만 둘인 어머니는 태어나서 처음 꽃을 받아 본다고 하셨다. 이놈의 아들쉐키들….


첫 번째 아무거나 퀘스트를 깨고 안도감이 끝나기도 전에 두 번째 아무거나 퀘스트가 찾아온다. 바로 어머니들의 한복을 맞추는 것. 이건 앞선 퀘스트 보다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가 있기 때문. 혼주 한복을 맞추는 날은 엄마와 어머니 사이에서 적당한 친밀감을 두고 기민하게 움직여야 하는 날. 우리 엄마와 너무 친하면 어머니가 서운하고, 어머니랑 너무 친하면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까 봐 강약 조절이 굉장히 중요한 날. 두 어머님이 만나기 며칠 전부터 눈치 챙겨서 잘 도와 달라고 남자친구를 혹독하게 교육시켰다. 그렇게 맞이한 한복의 날. 여러 가지 한복 스타일을 꺼내 보여주는 한복 가게 실장님에게 두 어머님은 ‘다 좋은 것 같다’며 다른 언어로 ‘아무거나’라고 얘기하셨다. ‘다 좋다’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군기가 바짝 들었다. 이거 정신 차리고 상황을 끌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더 다양한 디자인을 보여주려는 실장님을 막고 일단 입혀 봐야 했다. 배려하는 말과 행동은 쉽지만 진심이 드러나는 표정과 눈은 거짓말을 못하니 일단 입히고 얼굴을 살피기로 했다. 역시 입어본 두 어머니의 얼굴은 ’ 아무거나‘가 아니라 ’나 이 스타일이 입고 싶어 ‘. 숨길 수 없는 비 언어적인 표현 덕분에 두 번째 퀘스트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크고 작음의 차이지 아무리 슈퍼파워 E라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일말의 부담감을 가지게 된다. 하물며 새로운 가족이 된다는 건 이제껏 쌓여온 그 가족의 언어와 세계를 이해하는 일인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경험이 들까. 섬세하지 못한 내가 그 어려운 과정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선다. 생각보다 남에게 관심 없는 나의 성향을 내가 잘 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이 되는 것은 ‘나는 이래’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의 어떠함을 버리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안 하던 것을 해야 하고, 못하던 것을 해가는 과정인 듯하다. 어릴 적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시부모님 얼굴에 숨겨진 비언어적 표정을 읽어내고, 평소 습관과 취향을 기억하며 그 사람의 세계를 이해할 때 비로소 가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믿는 구석은 평생을 같이 살았지만 아직 부모님의 ‘아무거나’를 읽어내지 못하는 남자친구도 있으니까 시부모님을 만난 지 이제 5개월 차인데 조급해하지 말자. 아들도 아직까지 모르는데 며느리가 모르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리고 어쩌면 내가 아들보다는 빨리 알아차릴 것 같은데라는 이유 모를 자신감도 조금은 있는 듯하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면, 나 제법 결혼 생활 잘할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