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고기랑 우유만 사면 돼."
하고, 마트 문을 열었지만, 연약한 마음은 온갖 식재료 앞에 으깨졌다. 허허. 닭고기 너 참 옳다. 대패 삼겹살? 너는 더 옳다. 과자 10개 3,980원? 굉장한 녀석. 그릭 요거트 10개가 5,480원! 거대 자본의 박리다매! 한국 대형 마트 만세!
닭고기와 우유를 사러 들어갔지만, 결국 식재료만 4만원 넘게 사왔다. 마트에서 기절했던 정신은 집에 와서 깼다. 냉장고가 가득차면서!
책상 앞에 가계부를 놓고 비장하게 앉았다. 참담한 심정으로(아니, 뭐 참담하기까지야...) 핸드폰 일정표에 '무지출 day!'를 연속 6일 채웠다. 마트에서 4만원어치 식재료들을 살 때, '식탁을 최고로 가꿔 줄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하고 샀으니 더더욱 잘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이 녀석들이 삼시세끼 제 역할을 다 마쳐야 비로소 새 식재료를 사기로 결심했다!
강제적 무지출 day. 어찌됐건 일단 사지 않겠다는 결심. 무리한 듯한 도전인가 싶을 때는 머리로 알아서 반문한다.
'필요할 물건은 적시에 사야지, 너무 융통성 없는거 아니야? 좀 편하게 살아라.'
하지만 있어야 할 물건이 모자라야 '필요'가 생기는 법. 21세기 세계 11위 경제대국 대한민국에 살면서, '부족함'을 걱정하는건 매우 과했다.
우유만 빼고 5일 동안 식재료를 사지 않았지만, 여전히 찬거리들이 그득하다. 김과 미역, 카레는 기본, 고사리, 시레기, 양파, 양배추, 무, 계란, 치즈, 황태, 냉동전복, 냉동떡, 냉동만두, 냉동동그랑땡. 이 재료들로 양파치즈계란말이, 시레기 나물, 들깨미역국, 양배추 샐러드, 떡국, 동그랑땡. 여전히 하루 세 끼 밥상을 건사할 수 있다.
빵과 과자를 먹던 아이들은 오랜만에 냉동실의 곶감을 먹었다. 엄마가 과자 안 사주니 차선을 택한 것이다. 아이들 입맛도 좀 더 순해지는 듯하다. 오늘 오후 간식은 말린 사과를 줄 것이다. 빵 보다 낫다.
'필요하다고 생각했던건 잘 들여다보면 집에 있는 것들이야. 필요 없는걸 산다고 해서 편해지지 않더라. 아니, 이렇게 많은데 왜 더 사지?'
가혹하다 싶었던 5일의 무지출 day는 별일 없이 지나갔다. 오늘 하루 더 안 사면 결심한 대로 살아낸 셈이다.
필요하지 않는 것은 사지 않는다. 이건 옷이나 장식품처럼 기호 물품만의 얘기가 아니다. 냉장고와 찬장 구석구석을 꽉 채워 차지하고 있는 온갖 식재료들도 마찬가지다. 국 끓일 재료, 2~3가지 반찬 할 재료만 있다면 추가 먹거리는 필요 밖이다. 6일의 무지출 day는 어마어마한 결심 같지만, '필요한 식재료만 산다'는 원칙을 지킨다면, 고만고만한 일상을 해치지 않는다.
마트에서 장 보고, 더 많은 가짓수의 반찬을 만드는 수고로움을 줄였다. 대신 미니멀한 집을 유지하고, 방바닥을 자주 쓸고 닦아주며, 아이들 장난감도 한 번 더 정리한다. 그러고도 책 읽고 글 쓸 시간이 나며, 힘이 남으니 애들이랑 눈만 마주쳐도 이뻐 죽을만큼 사랑 뿜뿜 에너지가 넘친다. 부엌에서 비축한 힘 덕에 남편에게 1박의 자유를 먼저 권유 할 수 있었고, 교육과정 짜느라 진 빠진 남편은 약간의 쉼을 구했다.
독자들이여, 요리를 많이 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책을 읽으시길.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 빨리, 더 빨리,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리 -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로 시를 쓰고, 음악을 즐기고, 곱게 바느질하는 데 쓰자. 자연과 대화하고, 테니스를 치고, 친구를 만나는 데 쓰자. 생활에서 힘들고 지겨운 일은 몰아내자.
-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중. 헬렌 니어링 지음
구구절절 멋진 말은 다 했지만, 사실 나도 '무지출 day'를 매일 아침 7시 30분에 핸드폰 알림으로 받지 않으면 마트 간다. 사지 않는 습관은 자기 규제가 없으면 어렵다. 한국은 현관 문만 열어도 온갖 상품 가득한 거대한 쇼핑센터이기 때문이다. 눈 앞에 좋아보이는 물건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갖고 싶다. 이것만 있으면 인생이 더 좋아질건데 안 산다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기분이 든다.
삶의 만족을 떨어뜨리지 않고 얼마만큼 절약할 수 있을까. 필요 이상의 물건(식재료도!)으로 만족하기 보다, 딱 필요한만큼만. 대신 더욱 지혜로워 질 수 있는 독서와 삶의 길을 더듬는 글쓰기, 건강을 위한 산책,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아이와의 따뜻한 시간을 필요 이상으로 채웠다. 삶을 대하는 자세를 약간 고친 덕분에, 우아하게 절약하고 있다. 물론 아침 7시 30분에 '무지출day!' 알람을 받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