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이브가 천국에서 쫓겨난 것은 일종의 처벌이었기에, 동화나 성서의 창세기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그(싯다르타)가 자신의 발로 천국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질 것이다.
- <멀고도 가까운> 중, 레베카 솔닛 지음
레베카 솔닛은 부유한 집을 뛰쳐나온 싯다르타의 삶을 '거꾸로 흘러가는 동화'라고 했다. 그렇다면 제 방향을 찾아가는 동화는 뭘까?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의 결말을 말한다. 그 결말은 대체로 '얻는 것'이다. 보물, 아름다운 아내, 자식, 때로는 명예나 지위를 갖게 되야 그 동화는 행복한 결말이다.
그런데 싯다르타의 삶은 얼핏 비극이다. 싯다르타의 아버지는 그를 궁전에 잡아두기 위해 모든 것을 갖춰두었다. 젊음, 금, 아름다운 꽃, 맛있는 음식, 안락한 생활. 그렇지만 싯다르타는 끝끝내 동화를 역행한다.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지만 제발로 천국에서 걸어나와버린거다.
그럼 우리 절약가들의 일상은 어떤 방향의 동화일까? 돈 쓰지 않는 무지출 Day는 부(富)를 얻기 위해 시련을 참아내는 과정일까? 익숙한 동화의 흐름처럼?
편견과 달리 절약을 해도 현재의 행복이 크게 훼손되지 않는다. 참고 견디는 절약이 즐거운건 미래의 행복을 담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래를 상상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절약의 고통마저 기꺼이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일주일에 세 번은 맛집을 찾아줘야 살 맛 나던 내가 6900원짜리 돼지 안심으로 세 끼니마다 돈까스를 내놓을 수 있다면? 나는 돈으로부터 자립할 수 있게 된거다. 6900원으로도 네 식구 돈까스 먹으면서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절약 생활을 하기 전에는 네 식구가 6900원으로 먹을 수 있는 돈까스 집이 없어서 불행했을거다. 다음 월급날이 오기 전에 통장 잔고가 헐거우면, 두렵고 불안했을거다.
'다음 월급까지 일주일인데, 잔고가 15만원이야? 어떻게 살지? 신용카드라도 긁어야 하는건가?'
하고 말이다.
빛나는 물건이 없어도 삶의 만족감을 조절할 수 있다는 '자존감'과 '유능감' 또한 절약의 즐거움이다. 즉, 절약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얼마간의 돈에도 행복할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절약가들의 삶을 감히 싯다르타의 삶에 나란히 견줄 수는 없다. 그러나 '단식'을 '자립'의 기초로 삼았던 싯다르타의 삶과 '절약'을 '자립'의 기초로 삼는 절약가들의 태도는 일부분 닮아 있다. 부동산 부자인 김유라 작가가 10년 된 밥솥을 내솥만 바꿔가며 쓰고 있는데다가, '절약하면서 물건에 대한 욕심이 사라졌다. 대신 이 돈으로 아이들과 여행하며 경험을 쌓겠다.'하며 결핍 여행을 자처해서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절약하는 삶의 목적이 아주 큰 부자는 아니더라도,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는 점에서 '익숙한 동화의 결말'을 닮아 있다. 완전히 비워내는게 목적이 아니라, 얻는 것을 꿈꾼다.
번 돈 보다 적게 쓰고, 지출을 통제하면 돈이 남는다. 남는 돈은 축적되고, 부(富)를 일구는 씨앗이 된다. 바로 종잣돈이다. 절약해서 모은 돈을 탕진하지 않고, 두 부부가, 혹은 자손 대대로 물려줄만한 재산을 형성할 수 있다. 익숙한 결말의 동화처럼 절약으로 모은 돈이 우리 몸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